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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라산문학' 2024 제37호의 시(5)

by 김창집1 2025. 2. 20.

 

 

 붓꽃  양대영

 

 

과연 붓일까, 꽃일까

 

잎은 금방이라도 먹물을 찍어

일필휘지의 글발을 휘날릴 것 같고

 

꽃은 연못 주변에서

보랏빛 모자를 쓴 문화해설사의 모양이다

 

사방이 조용하다

 

매해 저렇게 피어나는 것도 신념이다

 

아무 말 없지만

깊은 속으론 온몸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 붓끝으로 살아가리라

 

 

 

 

하루 앓이 송인순

 

 

어제도 그러했다

오늘도 그러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아니 몇 달 전에도

 

돌려보기도

질릴 틈도 없는 시간 들이다

잠깐씩 찾는 달콤함

믹스커피 한잔으로 충분하다

 

이제,

굽은 어깨 펴볼까?

떠 있는 허공은 늘 같은 모양새

마음 구멍에 바람이 인다

    

 


 

소금사막 가는 법 양순진

 

 

시 하나 쓰려고 메모장 찾다가

급한 김에 옆에 있던

누군가 보내준 시집

누런 대봉투에 메모를 시작했다

 

보낸 이 주소와

받는 이 주소만 살던

사각 아프리카

 

생에 한 번 가보지 못한 소금사막

시로 떠나고 싶어

사전을 대륙처럼 펼치고

한자 한자 글자 타고 떠난다

 

나는 에티오피아 사막에 있는 격

소금사막은 하늘과 바닥이 하나

거대한 거울 속에 잠긴다

우기에는 땅에서 하늘 보고

건기에는 소금 호텔

모래 섞인 소금 폭풍과 섞이는 환몽의 밤

파란의 시간 잠겨 들어가는 중이다

 

눈떠보니

누런 소금사막 하단

대한민국 우편직인이

소금색으로 찍혀 있다

 

분홍의 일생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바다가 증발한

호수가 증발한

소금사막에서 사막 소금 결정체로

단단한 시간을 거쳐야 가능한 법

 

, 한때 소금사막에 있었네

 

 

 

 

왕준자

 

 

한나절 깊이면 스러지는

말들이 저만큼 간다

 

꼭 한번 말하고

다시 말하고

그것이 끝이라

아무 말 못하고

수군대는

아침이 오면

진종일 쏘다니던

그 말을 대신 하려네

 

 


 

묵언수행 - 정순자

 

 

추석이라고 통 큰 동생 보내온 통큰 장어

은박지 상자 안에 전사한 장군의 유해

해부된 알몸은 아이스 팩으로 밀납되어

거센 소용돌이 물살을 휘돌던

푸른 기억이 구불구불 살아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의 날개에 앉아

푸른 하늘 뭉게구름들과 입 맞추던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꽃밥으로 소꿉놀이하던

배시시 햇살 간지럽던 봄날이

그의 도톰한 속살에 배어 있었다

 

노련한 쉐프의 칼날을 당당히 맞받아낸

매듭 없이 길고 매끈한 긴 생

몸 안으로 몰려오는 비릿한 향료의 내음은

위험 수위에 달한 내게 가하는 일침인가

얼굴 가리는 보름달의 서늘함

 

 

*한라산문학동인회 간 한라산, 보길도를 걷다한라산문학 제37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