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꽃 – 양대영
과연 붓일까, 꽃일까
잎은 금방이라도 먹물을 찍어
일필휘지의 글발을 휘날릴 것 같고
꽃은 연못 주변에서
보랏빛 모자를 쓴 문화해설사의 모양이다
사방이 조용하다
매해 저렇게 피어나는 것도 신념이다
아무 말 없지만
깊은 속으론 온몸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 붓끝으로 살아가리라
♧ 하루 앓이 – 송인순
어제도 그러했다
오늘도 그러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아니 몇 달 전에도
돌려보기도
질릴 틈도 없는 시간 들이다
잠깐씩 찾는 달콤함
믹스커피 한잔으로 충분하다
이제,
굽은 어깨 펴볼까?
떠 있는 허공은 늘 같은 모양새
마음 구멍에 바람이 인다
♧ 소금사막 가는 법 – 양순진
시 하나 쓰려고 메모장 찾다가
급한 김에 옆에 있던
누군가 보내준 시집
누런 대봉투에 메모를 시작했다
보낸 이 주소와
받는 이 주소만 살던
사각 아프리카
생에 한 번 가보지 못한 소금사막
시로 떠나고 싶어
사전을 대륙처럼 펼치고
한자 한자 글자 타고 떠난다
나는 에티오피아 사막에 있는 격
소금사막은 하늘과 바닥이 하나
거대한 거울 속에 잠긴다
우기에는 땅에서 하늘 보고
건기에는 소금 호텔
모래 섞인 소금 폭풍과 섞이는 환몽의 밤
파란의 시간 잠겨 들어가는 중이다
눈떠보니
누런 소금사막 하단
‘대한민국 우편’ 직인이
소금색으로 찍혀 있다
분홍의 일생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바다가 증발한
호수가 증발한
소금사막에서 사막 소금 결정체로
단단한 시간을 거쳐야 가능한 법
나, 한때 소금사막에 있었네
♧ 말 – 왕준자
한나절 깊이면 스러지는
말들이 저만큼 간다
꼭 한번 말하고
다시 말하고
그것이 끝이라
아무 말 못하고
수군대는
아침이 오면
진종일 쏘다니던
그 말을 대신 하려네
♧ 묵언수행 - 정순자
추석이라고 통 큰 동생 보내온 통큰 장어
은박지 상자 안에 전사한 장군의 유해
해부된 알몸은 아이스 팩으로 밀납되어
거센 소용돌이 물살을 휘돌던
푸른 기억이 구불구불 살아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의 날개에 앉아
푸른 하늘 뭉게구름들과 입 맞추던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꽃밥으로 소꿉놀이하던
배시시 햇살 간지럽던 봄날이
그의 도톰한 속살에 배어 있었다
노련한 쉐프의 칼날을 당당히 맞받아낸
매듭 없이 길고 매끈한 긴 생
몸 안으로 몰려오는 비릿한 향료의 내음은
위험 수위에 달한 내게 가하는 일침인가
얼굴 가리는 보름달의 서늘함
*한라산문학동인회 간 『한라산, 보길도를 걷다』한라산문학 제37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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