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복의 꿈 – 양대영
흔히 몸빼라고 부르는
그 헐렁한 바지를 입고 늙은 여자들이
양배추 밭에 앉아 있다
무심결에 지나다 보면
모두가 같은 체형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어쩌다 내 눈엔 그 일복이
화려한 꽃나무로 보일 때가 있다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봄여름이 오고 가을을 건너가다 다시 또
그 모습이 지나갈 때면
아, 봄이로구나 느끼는 찰나에
벌써 여름으로 떠나버리지만
일복은 가족을 생각하는 선량한 꿈
꽃들이 폭풍에도 지지 않고
꽝꽝 쏟아지는 불볕에도 견디는 건
결코 슬프지 않은 생이 있기 때문이다
♧ ᄆᆞ루 물 – 양동림
과오름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 선 곽지리 끝자락
버스 정류장 마정馬井
ᄆᆞ루 물이 말 우물이 되어
힘들게 오르던 언덕이
힘찬 말이 되어 목마르지 말라고
마정
버스를 기다리며
ᄆᆞ루 ᄆᆞ루 생각하는
나의 목은 괜시리 칼칼해진다
♧ 거미 – 양상민
여덟 발톱에 포착된
먹이사슬의 지배자
시공의 명상 순수를 겨냥한다
차륜 은빛 그물에
바람을 부여잡는 허공의 덫
자유롭게 흐르는 미풍 위로
지나는 선율이 쫑긋 울 때
휙,
낚아채려는 비정한 푸른 눈빛
♧ 아버지의 걸음 – 이철수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부지런하고 단단한 버팀목 같은 아버지의 걸음
골수검사 받기 위해 온 병원에서
늙으면 여기저기 고장난다 구시렁거리며
아들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는 오리걸음
연한 잎에 까맣게 달라붙은 진딧물
습격당한 아가 머리 부스럼 보듯
아버지 얼굴에 번지는 검버섯
농사 핑계로 주말마다 가보지만
숨찬 아버지 걸음 뒤로
흐릿하게 피어오른 물안개
조급해진 아버지 마음
몸 부실하고 눈썰미 없는 자식에게
고통 없는 나머지 생 넘겨주고
덧없는 세상 탈출 꿈꾸지만
아무리 배워도 깨닫는 건
아버지 없으면 안 된다
자꾸만 아들 가슴에 피고 지는
숨 가쁘게 와 맺히는 걸음
♧ 겨울 태백산 – 임애월
길 잃은 생각 하나
바랑에 짊어지고
눈 깊은 천제단
능선길 오르면
죽어서도 천 년을
선 채로 사는 주목
그 희디흰 어깨뼈에
비켜 앉은 겨울 해
내 강물의 지류가
발원하는
누억 년 지켜온
침묵의 산맥 너머
등 좁은 멧새 한 마리
가부좌를 풀더니
견고한 결빙의 바람 속으로
흔들려 간다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 2024년(제15호)에서
*요즘 피어나는 백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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