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7)

by 김창집1 2025. 3. 21.

 

 

쓸모없는 능력

 

 

  자기 전공 분야에선 실력자임이 틀림없지만, 회사에선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신경증 환자인 그는, 머지않아 회사를 떠날 조짐이 보이는 사원으로 꼽혔다

  매사를 독불장군식으로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 동료 사원들이 마련한 소통의 시간을 가로막기까지 한 그의 행적에는,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기심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거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노출한 예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그는 비즈니스 기법으로 무장하기를 요구하는 상사에게 코웃음을 치며 맞서기까지 했다

  젊은 사원들이 앞장서 정직하고 양심적인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정풍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회사에 근무하는 거의 모든 사원들은, 그에 대한 나쁜 인식이 회사 내에 골고루 퍼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몇몇 젊은 사원이 익명으로 그를 퇴진시켜아 한다는 요지의 글을 사내 카페에 올렸고, 이를 읽은 사장은 곧바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알려진 소문과는 달리, 그의 능력은 정말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사막 여행

 

 

  햇볕이 작렬하는 날에야 사막을 걸을 수 있었다 사막은 거친 바람으로 가득했다 여행 전에 머리에 떠올렸던, 무지개가 뜨고 미풍이 불며 모래 언덕에서 야생화들이 웃고 있는 사막은 천국에서나 있을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야 할 방향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더 우리를 막막하게 했다 오아시스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번들번들한 샘물과 샘물을 둘러싼 주변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전부였다

  거듭 쌓이는 피로가 륙색 안의 곳곳에까지 스며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한가운데로 몰려왔다 이 국면을 벗어날 방안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는 여행을 포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막을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눈앞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혹여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에는 어느새 마음의 사막이라는 또 하나의 사막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독자적 생각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여기저기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실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얼핏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유는, 소수이기는 해도 성공에 대한 그의 독자적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도, 시민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생각은 타인의 그것과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독자적 생각은 보통 이상으로 고집스러웠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은 독자적 생각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자신을 지탱하는 힘으로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따뜻한 눈으로 기대해 마지않았다 제발 그의 독자적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숨 막히게 하는 일이 없기를

 

 


 

전위前衛의 음악

    -엔니오 모리꼬네

 

 

눈에 보이는 일상의 사물에는

씨줄과 날줄이 맞서 있음을

 

아메리카 들판의 건너편에는

짙푸른 평야가 펼쳐 있음을

 

날뛰는 지중해 연안 도시에는

깊은 계곡이 누워 있음을

 

힘차게 달려가는 말의 갈기에는

옛날의 노래가 숨어 있음을

 

흔들리는 패랭이꽃 가지에는

시간 분할의 능력이 들어 있음을

 

엔니오 모리꼬네는

애써 찾아내 우리에게 들려준다

 

 


 

환자 관찰 1

 

 

입에서 쉬지 않고 쏟아내는 말은

전시회장의 조명처럼 현란했다

 

지나칠 수 없는 게 있었다

주름진 눈언저리를 맴도는

검정 색깔의 냉기가 그것이었다

 

그는 마당 주위를 맴도는 나비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마침내

자신을 바꾸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때쯤에 이르러서야

냉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을 보고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눈언저리엔 맑은 기운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피어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환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이었다

 

 


  

환자 관찰 2

 

 

여기저기로 뱉어내는 말들이 간혹

하늘의 별처럼 반짝일 때도 있었다

 

거대한 체구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누가 보아도 심각한 것은

처음엔 모른 체 지내다가

조금 뒤엔 상대의 얼굴로 돌진하는

정체불명의 공격성이었다

 

그를 가만히 두고 바라보는 이유는

가둘 만한 공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두는 일이 필요하지 않아서였다

 

그가 마음먹고 골목에 출현할 때는

공중을 선회하는 까마귀조차도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한 날

그의 두피에서는 땀으로 범벅이 된

여러 개의 혈흔이 발견되있다

 

입원했던 환자임을 기억한 의사는

병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