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의 말
말하자면
하류에 흘러가는
물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었다.
2025년 4월
조한일

♧ 도서관에서 추사를 만나다
자가격리 6개월 리모델링한 도심 도서관
낯설어진 자료실에서 홀로 길 잃었다가
봉은사 판전板殿을 쓰는
추사 선생 만났다
원악도遠惡島 제주심 유배 해배된 지 백팔십 년
새 서가에 등 돌려 앉은 그를 본 사람 드물어
‘김정희’ 검색하고서
겨우 닿은 그의 거처
콘크리트 위리안치 도서관은 책 유배지다
부동의 위병들처럼 몇 년을 꽂혀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으면
경직되는 책의 관절

♧ 별점 테러
별들이 사라지고 후기는 난장亂場이다
펜션을 파괴하고 카페를 폭파하는
대중들 집중포화에 현장은 화끈하다
21세기 신기전神機箭에 두 손 두 발 다 드는
속수무책 테러 현장 고객의 거리 두기
진위를 확인하는 건 의미 없는 뒷북이다
진화하는 군중이 남겨놓은 고작 별 하나
낙인의 수단으로 목표물이 함락된다
별들을 손안에 넣는 소비 지향 테러리스트

♧ 종이사전
정원 초과 서재를 정리하는 늦봄 아침
지붕처럼 먼지 쌓인 다세대 책들 사이
빛바랜 국어사전에 손댄 게 언제였나
시집들 틈 박힌 돌 같은 영어사전 낡은 옥편
빠르고 편한 인터넷 사전 수고는 삭제돼도
모르는 단어를 찾던 유목의 낙타는 없다
검색하고 클릭하면 삼시에 번식한다
유의어 동음이의어 예문들의 산란장
종이는 나무의 예문이다 네가 내게 그렇듯

♧ 저녁의 행위
기울어진 운동장이 술병을 따는 저녁
‘쩍’하는 외마디 뱉고 입 다물고 멈칫하기
세상을 액체로 시는
내 방어술은 실전이다
숨 막혀 가슴 저려 밀폐에서 꿈꾸다
철문이 열린 순간 입 막고 소스라친
날 누가 끄집어내어
한턱내면 좋은 날
뒤집으면 바닥 파고 흔들면 벽 긁으며
눈 딱 감고 열어젖힌 술자리 파할 무렵
독주에 취한 저녁이
계산하고 먼저 간다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 (가히,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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