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의 말
오늘 저녁에는 라면을 끊였다
대파를 한주먹 넣고 먹었다
국가는 국민의 것이며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 깨지지 않기를
국가 권력에 희생된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25년 4월
대통령 탄핵 선고 전날이자 제주 4․3추념일
오광석

♧ 시오름의 봄
한겨울 땅속 깊은 자리
응어리진 혈血
실금 같은 햇살에 녹아 올라온다
붉은 동백꽃으로 핀다

♧ 청문회
모릅니다
제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누가 여기에 앉혔는지
아는 게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고
받는 만큼 사례하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뛰어서
뛰는 만큼 챙겨놓고
되는 대로 긁어모아
눈치껏 살아온 거 빼고는
저는 모릅니다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바보가 되라 했습니다

♧ 계엄령
아니에요
총은 그저 장식품이에요
쏘지 않을 총을 들고 다닌 거예요
군홧발 소리 안 나도록
살금살금 걸었어요
미리 짜둔 각본대로
헬기 타고 버스 타고
조용히 이루려고 한 거예요
시민들의 곤한 잠
깨울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얼른 끝내고
새로운 아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모두가 일어났을 때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게 하고 싶었어요
협의와 표결 대신
저의 위엄으로 이루는 나라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니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 나비
전직신청서를 보낸 후
12층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꽃 그림 바탕화면 모니터 위에
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높은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나비도 도시에 익숙해져
승강기를 타고 올라온 걸까
생화 한 송이 없는 공간
자리 잡은 나비
어찌 살아가야 하나
날개가 점점 처져 내려간다
어린 딸아이가 떠오른다
나비를 보여주고 싶어
높은 아파트들과 아스팔트 위
달리는 자동차만 보이는 공간
처진 어깨로 살아온 날들
꽃밭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활짝 꽃 웃음을 피워야 할 아이들이
늘 학원 뺑뺑이에 시달려
집으로 들어오는 모양이
꽃밭을 찾지 못해 말라가는
나비를 닮아 있다
바탕화면 꽃 그림처럼
자리에 박혀 있는 난
꽃을 키우는 곳을 찾아가려
자리를 정리한다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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