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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조(완)

by 김창집1 2025. 6. 25.

 

 

저녁의 눈빛 홍경희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훔치고 싶어 하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얼굴을 알지 못해 곁눈질로도 아버지를

배워본 적이 없는 아들은

 

무릎이 높아갈수록

아버지를 품어야 할 곳조차 비워진 제 속을

들킬까 봐 그늘을 만들지 않았다

 

아들의 아버지, 부풀어 오른 호칭이 생겨난 이후에도

머리와 심장 사이에서 헤매는 아버지가

한 번도 못한 아들 노릇이

아들의 아비 노릇이 등을 치는 것이다

 

오늘도 술자리에서 잠시 흘린

투병중의 친구의 아버지를 얼른 챙기는 것은

후배들의 기억에서 놓쳐버린

젊은 아버지를 자꾸 묻는 것은

 

마음 저편 아버지를 뵈러 가는

그 사내의 방식이다

 

세상의 아버지를 모두 훔쳐서라도

아들을 채워주고 싶은

그 사내의 태도이다

 

어제의 반몫이 추운 날에

담배를 절반쯤 피다가 꺼버리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문득 장영춘

 

 

갑자기 십이월 기온이 뚝 내려간 날

두툼한 옷을 입고도 춥다고 푸념하다,

저 멀리 뤼순감옥에 걸린

얇디얇은 죄수복 한 벌

 

영하의 추위를 견디는 것보다 더한 건

나라를 잃은 슬픔만큼이나 했을까

춥다고 꼭꼭 껴입은

내 옷이 무색했다

 

 


 

피로회복제 주세요 조한일

 

 

되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때로 돌아간다고?

뚱딴지같은 소리 하네

 

다시 또

피로하겠다고?

손님, 정말이세요?

 

 


 

하루를 퇴고하다 한희정

 

 

두툼한 트럭 사이 패치처럼 앉아 있다

추월하는 양쪽 차선

깜빡이도 못 넣은 채

길바닥 궤도 밖으로

어긋나는 문장 한 줄

 

사는 게 경주라지만 그래봐야 멈춰 서는

저 붉은 신호등이

쉼표 톡! 찍는 순간

맥 빠진 문장 사이에

행간이 붉디붉다

 

어쩌면 이 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야

바뀐 신호 앞에

전조등을 밝히며

어스름 길을 달린다

스스로를 밝힌다

 

 


 

서울에 가면 홍성운

 

 

섬사람 서울에 가면 으레 가는 곳 있어요

인사동 뒷골목 찻집 귀천을 들러서

천상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한마디는 들어야죠

 

좁디좁은 골목식당 어디를 잡는데도

누구도 흉보지 않는 소박한 곳이라서

막걸리 한 대접으로

이야기가 풀리죠

 

그런 뒤 괜찮다면 북촌을 가야지요

가다가 지청천 장군상에 합장 배례하고

북악산 늠연한 자태에 눈길을 주어야죠

 

남녀노소 가까이하는 찻집들도 있어요

녹차를 주문하고 먼 풍경 바라다보면

동유럽 대사관 문도

이따금 열릴 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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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시집

 

 

                   * 계간 제주작가 2025년 봄호(통권 제8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