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녁의 눈빛 – 홍경희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훔치고 싶어 하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얼굴을 알지 못해 곁눈질로도 아버지를
배워본 적이 없는 아들은
무릎이 높아갈수록
아버지를 품어야 할 곳조차 비워진 제 속을
들킬까 봐 그늘을 만들지 않았다
아들의 아버지, 부풀어 오른 호칭이 생겨난 이후에도
머리와 심장 사이에서 헤매는 아버지가
한 번도 못한 아들 노릇이
아들의 아비 노릇이 등을 치는 것이다
오늘도 술자리에서 잠시 흘린
투병중의 친구의 아버지를 얼른 챙기는 것은
후배들의 기억에서 놓쳐버린
젊은 아버지를 자꾸 묻는 것은
마음 저편 아버지를 뵈러 가는
그 사내의 방식이다
세상의 아버지를 모두 훔쳐서라도
아들을 채워주고 싶은
그 사내의 태도이다
어제의 반몫이 추운 날에
담배를 절반쯤 피다가 꺼버리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 문득 – 장영춘
갑자기 십이월 기온이 뚝 내려간 날
두툼한 옷을 입고도 춥다고 푸념하다,
저 멀리 뤼순감옥에 걸린
얇디얇은 죄수복 한 벌
영하의 추위를 견디는 것보다 더한 건
나라를 잃은 슬픔만큼이나 했을까
춥다고 꼭꼭 껴입은
내 옷이 무색했다

♧ 피로회복제 주세요 – 조한일
되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때로 돌아간다고?
뚱딴지같은 소리 하네
다시 또
피로하겠다고?
손님, 정말이세요?

♧ 하루를 퇴고하다 – 한희정
두툼한 트럭 사이 패치처럼 앉아 있다
추월하는 양쪽 차선
깜빡이도 못 넣은 채
길바닥 궤도 밖으로
어긋나는 문장 한 줄
사는 게 경주라지만 그래봐야 멈춰 서는
저 붉은 신호등이
쉼표 톡! 찍는 순간
맥 빠진 문장 사이에
행간이 붉디붉다
어쩌면 이 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야
바뀐 신호 앞에
전조등을 밝히며
어스름 길을 달린다
스스로를 밝힌다

♧ 서울에 가면 – 홍성운
섬사람 서울에 가면 으레 가는 곳 있어요
인사동 뒷골목 찻집 ‘귀천’을 들러서
천상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한마디는 들어야죠
좁디좁은 골목식당 어디를 잡는데도
누구도 흉보지 않는 소박한 곳이라서
막걸리 한 대접으로
이야기가 풀리죠
그런 뒤 괜찮다면 북촌을 가야지요
가다가 지청천 장군상에 합장 배례하고
북악산 늠연한 자태에 눈길을 주어야죠
남녀노소 가까이하는 찻집들도 있어요
녹차를 주문하고 먼 풍경 바라다보면
동유럽 대사관 문도
이따금 열릴 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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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시집
* 계간 제주작가 2025년 봄호(통권 제8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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