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몸비 – 최경은
손가락 언어들이 안부를 묻는다
걸음 속으로 들어간 발걸음이
도심을 점령한다
금이 간 액정 화면이 있더라도
무늬들만 있으면 그만이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얼굴들의 배경과 출처는
손가락은 길어지고
투명한 독방은 견고해진다
우리는 독방이 독방인지 모르고 독방을 즐긴다
독방을 사랑하고 길들여진다
안부가 발에 걸려 넘어지고
주춤거리는 행렬에
바닥에 쓰러져 옮기지 못한 걸음이 다른 걸음을 들어 올려
알 수 없는 얼굴들로 겹쳐진다
손에 움켜쥔 고요와 소란이
몸에서 사라졌을 때
떨리는 손을 향한
무기력한 우울이 허공을 터치한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속에
길들여진 불안을 밀어 올린다

♧ 고드름 – 권순자
사방이 너무 추위
마음이 얼었네
한 방울 두 방울 가슴에 쌓인 한
뻗고 뻗어서 얼음 깡으로 변하네
부드럽고 순한 성질이 갈 곳 잃어
저리도 딱딱하게
저리도 뾰족하게
자라네 자신도 모르게 차갑고 냉정하게
더 자라기 전에
따스하게 품어 주리
봄바람보다 여리게 흘러서
풀잎에 머물러 풀과 꽃을 키우게
풀어지고 풀어져서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어
세상에 스며들게

♧ 출근길 – 김기호
별들이 쏟아지는 새벽
게임 규칙이 지켜지는 세렝게티
마라강* 같은 지하철을 타고 달린다
욕망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질서 속에 함께 달리는 누 떼들
마른 들판을 떠나
푸른 초원을 찾는 이유다
초원에 해가 지고
다시 새벽 별이 쏟아지면
나는 내일도 마라강을 넘는다
---
* 아프리카 동부 탄자니아에 있는 야생 국립공원 세렝게티에 있는 강. 초식동물들은 말라 버린 땅을 뒤로하고 생존을 목적으로 위험이 가득한 마라강을 넘어야 한다.

♧ 꼰지발 – 김나비
현관문 열고 족자를 펼치면
하얗게 기지개를 켜는 길
발끝을 세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가 접혔던 사물들이 키를 세운다
파 파 파 푸른 음절 소리 내며 파밭이 일어나고
해무에 젖은 솔숲이 뾰족한 단어를 뱉으며 다가오면
수평선에 붉은 어절 토하는 노을
촘촘한 조가비 껍질이
단단한 구절로 박혀 있는 해변이 발밑에 일어나는데,
꼬시랭이와 톳이 문장처럼 조각조각 널브러지는 모래사장
그 위로 파도의 연들이 쌀알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손을 내밀면, 내게는 닿을 수 없다는 듯
뒤꿈치만 보이고 사라지는 당신
펼쳤던 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음과 모음의 파편들이 짓이겨진 채 박혀 있는
신을 털고 방문을 연다
누수된 생각들이 방 안 가득 떠서 술래잡기하고,
길을 도르르 말아서
끈으로 묶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좁은 창 향해 서서 발톱이 빠지도록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별빛만 두근거릴 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

♧ 꽃도둑 – 제갈양
새 꽃을 가져다 심었는데
이듬해 앞집 옆집 같은 꽃이 피네
우리 집보다 먼저 피네
언제 누가 캐어 갔을까
꽃도둑을 잡으려고
꽃이 피는 밤낮으로 지켰건만
도무지 종적을 모르겠는데
올봄도 이곳저곳 약 올리듯 피어
동네방네 눈부시게 퍼졌다
이 엉큼한 도둑은 누구일까
눈에 꽃불 켜고 지켜보아도
곁을 지난 건 한 줄기 바람뿐!
이따금 집 주변을 맴돈 겉
수다스레 지저귀던 종다리 한 쌍뿐!
* 월간 『우리詩』 6월호(통권 제444호)에서
*사진 : 야생 별수국(2025.6.22. 거슨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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