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와 나
네가 울면서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 아버지
세상은 축복이 있다고 하는데
하늘 땅 나무 꽃 새 나비들
세상은 사랑이었다는데
그때 너는
햇살이 환하였을까,
구름이 무거웠을까?
그때였을 거야
내가 너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네가 들소처럼
떠돌 때
네게로 가면서
기도를 배웠고
한없이 기다림으로
노래를 배웠다
이제는 네게서 돌아와
다만 기다림의 자세,
나무처럼 비우고 서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 우연에 대한 생각
산길을 오르다가 우연히
분홍 꽃술 한들거리는
아, 술패랭이꽃!
이 길 수없이 오가며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는데
어느 날엔가
밤하늘을 소요할 때
유난히 깜박이던 별 하나
긴 꼬리 흘리며 사라질 때
얼마나 마음 졸였느냐
먼 우주 어느 별에 우리의
최초의 설계도면이 있었을까
한 치의 오자도 없이
이 엄청난 우연
예정된 약속이었나
산길을 가다가
우리는 우연히
분홍색 술패랭이꽃
어느 하늘가에서
그리움으로 떠서
글썽이는 별일까

♧ 잃어버린 발자국
해는 중천에 누렇게 뜨고
아지랑이 불타는 들녘, 문득
사위는 멈추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성 영화 속을 걸어가는 실루엣
어린 적 볕이 과랑과랑한* 들녘에서
탈*을 따먹으며 길을 잃었을 때,
겁이 와락 났을 때, 꿈결인 듯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내 안에 누구실까
멈칫 멈추면 멈추고, 다시 걸으면
뒤를 당기는 목소리
슬며시 돌아보니,
저 어린것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너 거기서 왜 울고 있니?
-발자국을 잃어버려서요.
그깟 발자국은 어따 쓰려고?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번쩍!” 번개가 스치자
아이는 간 곳 없고,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과랑과랑 : (제주어) 햇볕이 이글이글 타는 듯한 모양.
* 탈 : (제주어) 산딸기.

♧ 강나루(此岸)의 대화
강나루에 무연히 섰노라니
하루를 무겁게 굴려온 해
불타는 강물로 잦아들 때
줄곧 따라온 바람일까, 툭 친다.
당신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을 건너려고 도강선을 기다리고 있지요.
나룻배는 언제 도착합니까?
-그야 강주인의 마음이겠지요.
당신이 줄곧 걸어온 길은 무엇입니까?
-후회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입니다.
그때마다 사정없이 엉덩이를 들이받는
성질 고약한 염소 한 마리 몰고 왔지요.
당신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행복은 무엇입니까?
-아, 그 또한 후회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입\
왜 그런가요?
-행복은 그 모든 것의 화학 작용일 테지요.
바다의 눈물 진주를 보세요,
그 은은한 무지갯빛이 아픈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당신은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회초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용서의 눈물이지요.
아버지는 먼저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십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어머니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질투도 뚫지 못하는 암탉의 날개지요.
‘엄마’, 이는 너무 슬픈 이름이지요.
그러면 이성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바라볼 때 황홀한 별,
닿는 순간 스러지고 마는 별,
언제나 가슴에서 반짝이지요.
그러면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까?
-그것은 그리움 너머에서 피는 꽃,
나를 다 소진하고 나서 비로소 피는 꽃.
왜 세상에는 완전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까?
-탐욕 때문이지요. 탐욕으로는
거울의 뒷면을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왜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가요?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니까요.
허공은 텅 비어서 어디나 가득하지요.
그러면 사탄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둠의 제왕, 죽음은 그의 권력,
쾌락과 욕망은 그의 전가의 보검이지요.
사탄의 유흑은 무엇입니까?
-그의 혀 밑에서 내뿜는 모호한 안개지요.
개념이 삭제된 환상 속에 몸을 숨기지요.
당신의 약점을 살짝 말해주시겠습니까?
-음…… 핑계입니다.
본의 아니었다는, 너무 취해서 필름이 끊겼다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시를 쓰십니까?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겁니다.
길을 가는 자의 노래이지요.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삶을 원하시나요?
-저 타이타닉호의 악사들의 연주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순간까지 연주하는 것이지요.
아, 배가 도착했군요. 잘 가세요.
-잘 있어요.
세상에 미련도 없다 했는데
왜 눈물이 나죠?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 (푸른생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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