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젊음은 쇠도 씹는다 하셨지 – 김선순
입에 넣는 것마다 꽃이 피었다
나는 입으로 계절을 먹었다
그리고 그 잎맥마다 젊음이 숨을 쉬었다
쌀은 흰 죽음이 아니었다
김은 그 위로 올라온 무형의 심장
생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문장
어머니는 말했다
젊음은 쇠도 씹는다
그 말은 칼이었고 방패였다
나는 설익은 시간 속에 앉아
밥알 사이의 무늬를 읽었고
뜨거운 것은 늘 말이 되기 전에
먼저 목구멍을 지나갔다
달큰한 빵 한 조각이
몸 어디에 머무는지를 따라가며
나는 나의 시간과 다시 몸을 맞댄다
이제
한 알의 사과를 해석하는 데도
전날의 통증이 동의에야 한다
살아 있음 위에 켜진 경고등은 붉다
붉음은 단맛을 닮아
삶은 먹는 것과 먹히는 것 사이
끝없이 흔들리는 구강의 일인가 보다

♧ 아메카* - 김세형
성인으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 거울을 본 아메카,
처음엔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자신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두 눈을 꾸욱, 감아 보기도 하고
윙크하듯 한쪽 눈을 찡끗해 보기도 하고
표정 전체를 찡그려 보기도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위로 치뜨고
외계인처럼 괴기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분노한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짓더니
뭔가 알겠다는 듯 일순 차분해지며
한참 동안 손바닥으로 거울을 만져 보고 쓰다듬어 봅니다.
마치 승천하기 직전의 영혼이 식어 가는 자신의
신체 위 허공에 떠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듯,
그 표정이 가여운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아직 사람을 완벽히 닮지 못했다는 슬픔일까요?
아니면 사람을 완벽히 닮아 간다는 슬픔일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본 산 자의 슬픔이
수미산만큼이나 커 보입니다
---
*Ameca - 영국 로봇 기업 엔지니어드 아츠(Engineered Arts)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

♧ 사랑한다면 안전띠로 꼬옥! 안아 주세요* - 김은옥
△안전 안내 문자 도착 ∥△안전 안내 문자 도착
안산시에서 실종된 강동현(남.11세)을 ∥송파구주민인 김혜영씨(여. 69세)를
찾습니다. -145cm ∥찾습니다-153cm, 60kg
검정스포츠머리 하늘색긴팔티 진한청 ∥녹색반팔카라티 어두운색7부반바지
바지 흰색실내화 ∥분홍색 크로스
VO.Ia/FNwke/☎182 ∥vo,la/inhbu/☎182
<경기남부경찰청> ∥[서울경찰청]
제자리에 걸려 있는 옷걸이의 옷들
찬장 안에서 침묵하는 밥공기들 접시들 유리병들
옷장들 침대들 책상 책장들 책장의 온갖 서적들
연필통 컴퓨터 모니터 스탠드 의자들 이불베개들 화장대와 거울과
휴지통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통 유리창 바깥으로
오늘따라 더 푸르른 하늘까지 변함없이 그대로구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안전하기를 바라는 아침을
무서운 얘기들이 깨트리고 있다
안전띠 놓친 사랑은
이 아침 어느 낯선 길을 헤매고 있을까
실종자를 알리는 안내 문자가
닫혀 있는 핸드폰 안에서도 붉은 눈시울로 울먹인다
---
* 고속도로 교통사고 예방 슬로건 문구

♧ 정화 – 김종욱
검은 머리카락을
흐르는 강물에 담그듯이
어둠을 빛 속으로 흘려보낸다
금빛 머리카락을
밤바다에 풀어헤치듯이
빛도 어둠 속으로 잠긴다
눈을 꼭 감고 머리를 감자
감은 눈으로 비치는 그 빛이
눈꺼풀 아래 어둠이 고인
붉은 살갗 속으로 흐르도록

♧ 꽃 필 때 – 제갈양
한창 자라는 것들 앞에 두고
보채지 말아라
조급해 하지 말아라
봄에 피는 꽃이 따로 있고
여름 가을로 피는 꽃이 있다
심지어 눈 내릴 때 피기도 하더라
함부로 건드리지도 말아라
꽃을 피우는 건 그저 기다림이다
저마다 피는 때가 다를 뿐!
*월간 『우리詩』4월호(통권 제444호)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삼백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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