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밥
친구들이 나에게
밥이라 한다
그래, 나는 밥이다
한여름 뙤약볕에 목마름 이겨내고
할퀴며 쥐어뜯는
비바람도 이겨냈다
한 톨 한 톨 내 낱알
드디어
용광로처럼 끓는 물
다 이겨내고
이 세상 밥이 되었다

♧ 사람꽃
눈뜨고 보는 세상이
바로 봄날이다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다
우리들은 모두 피어난다
향기가 난다

♧ 궁상떨기
이즈음 나의 시는 침묵을 앓고 무뚝뚝해졌다 탄력성을 잃었다 웬 형상이 그려지다가 무기력하게 입 다물고 돌아서 버린다 가뭄이 길어 농촌이 아우성이라는 뉴스가 끝나자마자 빗발이 창문을 두드린다 내 사유思惟가 급히 만발해진다 사물 하나 울타리를 넘나드는 게 들린다 오 누가, 무엇이 잉태될 것인가 펜을 단단히 움켜쥐고 기다린다 창밖을 서성이다 끝내 창문을 못 뚫은 시가 다시 돌아간다 아, 너의 침묵을 또 보았다 부디 처연한 상처를 입고 돌아갔기를 빈다

♧ 불면증
평생을 불러다 쓰는 잠이
부르면 다가와서 서성대는 잠이
낡고 비루해졌다
어디 갔다 다시 오는지 몰라도
요즘은 불러도 못 들은 척
하여간 청개구리 같은 내 잠
언젠가 세파가 산산해지는 날
내가 부르지 않아도
안개꽃처럼 피어나며
이 불면의 밤 데리고 떠나겠지

♧ 누설의 끝
긴 세월 밤길 헤매는 나를 쌍심지 올리고 보던 별들이 이제 추레한 내가 별 볼 일 없는 듯 서서히 나를 누설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는 별이 나를 반짝이면 중간 별 먼 끝별까지 잇달아 나를 반짝인다 별들은 말을 하고 싶으면 반짝거리는 게 습관이다 별들이 반짝이는 건 다 대화다 별별 나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밤하늘엔 잡설과 평설이 무성하다 별 하나 삽시에 한라산 너머로 떨어진다 별들은 저들끼리의 누설은 다 끝났는 듯 한 번 흠칫하고는 다시 평온하다 그래, 나에 대한 누설도 다 끝났을 것 내가 저리 떨어져도 그럴 것이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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