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위사 – 이학균
고목으로 길을 가리지 않았다
전각으로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마을 고개에 서면 눈이 환해지는 고향처럼
여린 햇살 아래 무심하게 엎드린 지붕들이 다정하다
월출산 골짜기가 생길 때부터
그곳에 늘 있었던 것처럼
애써 꾸미지도 않고
굳이 감추지도 않은 달빛 같은 풍경
텅 비어 있는 듯하여 다가가면
우주를 품은 아이처럼 깊은 이야기 들려준다.

♧ 등이라는 얼굴 – 한상호
떠나는 사람이
등을 보이는 것은
얼굴이 차마 못 하는 말을
등은 하기 때문이다
등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떠나는 사람은
구멍 뚫린 섬 하나를 두고 간다

♧ 마티스 할머니 – 김정식
그녀는
박스를 접으며 자르고
구겨서, 세상을 컷아웃* 한다
중심과 배경을 바꿔 가며
새벽과 아침 오후와 땡볕
황혼이 지는 저녁에
도로 위를 모아 자르고
붙인다
그녀의
청색의 얼굴과
단순화를 위한
단벌의 못은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
지구의 붉은
자전축을 기울인다
인간이 채색한 유화 물감을 버리고
흩어진 삶의 조각
세상의 지문들을 모아
그녀의 주름진 손은
느리지만 부드럽게
붉게 칠해지는
대지의 종이를 손으로 푸르게 감싼다
원을 그리며 손수레 바퀴를 따라
춤을 춘다
태양 빛을 감싸는
그녀의 점묘화
오후의 지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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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스가 창안한 종이 오리기 기법

♧ 새우 – 도경희
지구에서 가장 깊은 어둠 마리아나 해구에서 발견한 한 새명체에게 과학자는 '플라스티쿠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그 새우 몸속에서 길이 0.65mm의 미세 합성 섬유가 검출되었으므로 인류가 버린 플라스틱이 북극의 얼음 속과 외딴 섬마저 포로로 잡고 말았다 새우 플라스티쿠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욕망을 증언한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막 중환자실을 나서는 환자 같은 늙은 지구덩어리 과학자나 정치지도자들은 한 손으로는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창백한 푸른 별을 아프게 하는데 앞장선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플라스티쿠스라는 새우는 내가 누린 편리의 대가며 버림의 재앙이다 “지금 우리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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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rythenes plasticus - 플라스티쿠스
** 프란치스코 교황 “찬미받으소서" 17항.

♧ 물 밑 흐르는 달 – 방순미
하늘이 물속
들여다보는 밤
물 아래
달이 흐른다
가만히 숨 고르고 앉아
찢기지 않는 달을 마주한다
뜨고 지는 우주의 빛
누가 가른단 말인가
물이 기억하는
달 발자국
물의 언어로 듣는
침묵의 밤
백두산 천지에 닿은 달빛
백록담에도 고요히 내리겠다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48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한라돌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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