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틈 – 배철성
틈이 생기면
빈틈 속을 걸어가 보고 싶다
비 오는 오전 베란다에 앉아 있어도
창밖 강물에는 아무런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밖을 내다본다고 하여도 딱히 바깥세상에 관심 가질 틈도 없다
더러 비난 받을 틈이 생길 때마다 빈틈없이 틈을 내고
광장의 사람들 틈에서 빈틈을 노려보지만
도무지 틈을 찾을 수 없다
틈만 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틈이 생길 것 같았지만 온종일
틈은 나지 않았고 어느
틈에 4시가 오후의 빈
틈을 채우고 있을 뿐
틈 있는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다
틈틈이 시간을 나누어 틈을 만들어
내 빈틈 깊이를 가늠해 보지만
좁다고 하기에도, 넓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틈
가시거리 너머까지는 가릴 필요가 없는 틈
틈 속이 왜곡되어 있는지
틈이 정곡을 찌를 것인지
틈을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다
저녁 하늘 빈틈을 가르는 바람이 지나간 곳에는
어떤 형태로든 틈을 남긴다고 한다
틈을 만드는 바람을 따라
틈나는 대로 예리한 빈틈을 쓰다듬으면
틈은 등글게 공글리지만
등근 틈에서도 웬일인지 각진 소리가 들리고
틈 속의 하얀 속살에서는 예각의 맛이 난다
사전을 뚫어져라 훑어보지만, 꼭 찾아야 할 단어도 없던 틈새
틈만 나면〉이란 TV 프로그램에서도 틈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심야 재방송이 끝나는 틈에야 알아차린다
잠을 비운 틈에 꿈은 빈틈을 채우려 하지만
좀처럼 틈은 지워지지 않고
새벽이 깜빡 졸고 있던 틈에
일찍 일어난 기지개가 아침을 깨우고 있다
밤새 빈틈은 찾지 못하고 틈을 닫는다

♧ 크라운산도 – 여국현
강의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지방대학 강사휴게실 꽃무늬 접시에 과자 몇 가지런히 놓여 있었네 오리온 초코파이 에스프레소 에이스크래커 후렌치파이 자유시간 그리고 크라운산도 나는 처음 보는 에스프레소 크래커의 커피 향과 후렌치파이의 중간에 얹힌 달달한 딸기 맛 허니 쨈에 끌렸지만 오랜 애정의 습관에 굴복했네 크라운산도를 들어 우윳빛 포장을 옆으로 쭉 찢은 뒤 하얀 크림이 발린 물방울 왕관 무늬의 동그란 과자를 꺼냈네 덮개에 묻은 요플레 빨아먹듯 크라운산도는 돌려 먹는 맛 균일한 힘으로 과자를 서로 반대쪽으로 돌려 떼어냈네 양쪽 과자에 하얀 크림이 공평하게 남았네 나무젓가락 똑같이 쪼개질 때처럼 슬그머니 이는 범속한 쾌감
오래전 크라운산도를 나누며 그 사람은 말했네 똑같이 사랑하는 거라고 이별은 없는 거라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양쪽 과자에 하얀 크림이 공평하게 묻지 않은 순간도 많았지만 애써 외면했거나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거나 혹은 기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쪽이 남아 추억이 되는 법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을 뿐이었거나 두 번째 크라운산도의 하얀 크림은 왼쪽 편 과자에 수북했네 나는 크림이 없는 과자를 내려놓고 다른 과자의 하얀 크림을 혀끝에 대고 천천히 핥아먹었네 우윳빛 얼굴의 그 사람도 서로의 입에 묻은 크라운산도의 크림을 핥던 라일락 꽃향기 짙던 그 봄날의 밤을 한번씩 떠올릴까 강의를 앞둔 지방대학 휴게실에서 나는 크라운산도를 천천히 핥아먹었네 창밖으로 크림빛 봄이 흩날리고 있었네

♧ 섬 – 오병현
바다 한복판에
섬 하나는
너무 외롭다
섬 하나 없는
바다뿐인 망망 바다는
더욱 외롭다
좌우로 뚜렷하게 갈린
파란 바다와 붉은 바다뿐인 바다는
더더욱 외롭다
하나라도 섬이 그립다

♧ 테라스 – 윤순호
마당을 기는 지렁이가
이팝나무가 떨군 마른 꽃잎을 입고
끈적끈적 방향을 훑는다
고추를 갈던 체머리 할머니
귀가를 포기한 요양원 출타가
엊그제 같은데
병환은 오래전이었다고
빈 화분들이 잡초를 키우고 있다
담 너머 공원 짙어 가는 녹음은
물까치가 점령한 지 오래
퇴색한 비치파라솔 아래 달군 고기판이
삼겹살을 굽는다
'죽엽명주'가 격의 없는 인연들을 불렀다
점심 한 끼의 사랑이
봄날 햇살로 환하게 피고 있다

♧ THE HILL, Northeast St. - 김정범
걸어갔어
왼손에 맵을 들고
엉킨 거미집을 등에 지고 뱅뱅 돌았지
공가
가공을 기다리는
유령도시
그림자 하나가 붉은 스프레이 래커를 담에 뿌렸지
입 안의 공기가 타올라
파멸하는 대추나무에 옮겨붙었어
벌레는 중얼거렸지
사천 만 원짜리 모던 하우스는 어디에 있을까
럭셔리 실버 하우스
하얗게 재로 바뀌는 운동화
소리치며 갈라지는 나무 대문에 박힌 말
넌 뭐니
노 머니
중얼거리는 입술 끝으로 검불이 엉겨 붙었어
까만 유리창에 매달려 까딱거리는 시간
아니
유령들의 얼굴이 보였지
허공은 끝없이 숯을 던지고
마르고 흰 사내
벗겨진 이마에서 이글거리는
세상에 남은
가장 순수한 정의
보이지 않아
희미해진 손바닥 위에 가만히 집을 그려 보지만
막힌 숯길 끝에서 그는 끝없이
증발하는 중이다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4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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