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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5)

by 김창집1 2023. 11. 30.

 

 

풍선초의 비밀 - 한명희

 

 

풍선초의 너비를 헤아리게 된 건

지난 늦가을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푸른 표정의 줄기들을

고사목 주위에 걸쳐 놀 때만 해도

그저 제자리를 지키는 방식으로 알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초록의 씨방마다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작은 궁금증이 찾아왔다

 

내 성장통이 욱신거리며 피어날 때

잘 익은 화초꽈리 하나 뚝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려 보았던 적이 있었다

 

톡톡 터지던 그 분홍의 느낌이

몸속으로 천천히 퍼져나가자

딱새알만 한 가슴을 꼭꼭 숨기느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닌 시간의

수위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했다

 

풍등처럼 매단 꼬투리에

씨앗 몇 개 품어놓고

풍등초야, 너도 지금

매달린 자식들 올망졸망 가난한 저녁을

여린 손끝으로 뻗쳐나가려는 동안은 아니었느냐

 

 

 

 

온도와 사랑 - 손창기

 

 

온도가 높을수록 사랑은 더 빨리 식는다

 

끓어오르는 바닷물로

앨버트로스는 한숨짓는다

해수면 상승으로 먹이가 부족해져

더 멀리 날아가야만 한다

 

여전히 사냥의 피와 심장의 물결은 붉은데,

수컷이 돌아오지 않을까 지레짐작해서

보이는 것이 없으면 더 지루해서

금세 암컷은 다른 수컷과 짝짓기 한다

 

몇 달도 안 되는 날에

며칠간의 믿음은 기후 따위는 생각지 않아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사랑도 기후의 영향을 받는 걸 몰라서

돌아갈 때까지 애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먹구름 낀 날

돌아온 수컷은 비처럼 떨어진다

슬픔을 닮은 피곤함이

날개 끝부터 점점 검어져 온다

 

지구 온도가 오를수록

달빛과 별빛마저 상한 무정란처럼 터져 비릿하다

새들의 비행길도

사랑의 항법계기에도 금이 간다

 

 

 

 

고향 김영호

 

 

겨울밤 칼바람이

몰아치고 메어치는 소리에

물설고 가슴 시린 꿈속에서

아궁이 속에서

고구마 구워지는 냄새 그리워

 

잊어볼까 벗어놓은

아득한 기억이기에

눈 감아도 보이는 듯

고래심줄 같은 추억들이

손바닥 손금 따라 고향길 따라간다

 

논밭길 가로질러

언덕 돌아서면

송아지 울음 울어

시래기 된장국 향기 넘치는 곳

그곳이고 싶어라 달려가고 싶어라

 

 

 

 

열린 항아리 성옥순

 

 

얘야

 

굴뚝새 조잘조잘

눈 오겠단다

물두멍 채우거라

 

아침 안개 자욱한 게

오늘 볕 좋겠구나

장항아리 열어라

 

된장 단지 아가리

망 씌우는 거 잊지 마라

쉬파리 드나든다

 

저 뒤켠 이 빠진 큰 항아리

맑은 물 절반 채워

항시 열어 두거라

 

하늘 손님 쉬어가게

 

 

 

 

원근법으로 다가가는 성소 - 김혜천

 

 

겁의 겁

 

잠자리가 날개로 바위를 쳐

가루가 될 때까지 걷고 걸어 도착한

여기 지구는

푸르고 건조하고 습하다

태생부터 위태로운 착지

 

무수한 체념의 골짜기마다 이슬 맺히고

자주 길 잃고 절벽 앞에 섰던 망명의 길

 

그 길에서

글 만남은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돌아가리라

 

내 안에서 섧게 빛나는 원래의 자리를 향해

허물 벗으며 벗으며 가리라

 

온몸에 젖어들어 채색된 그리움은

새로운 출발의 동력

 

쓰리고 아팠던 파동의 회색 음영을

정진의 강물로 지우며

발자국마다 투명하고 서툰 문자를 남기며

 

잠자리 날아가는 폐곡선을 따라

 

 

                          * 월간 우리11월호(통권 4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