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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5)

by 김창집1 2023. 11. 28.

 

 

동백과 고구마

 

 

가을 햇살 팽팽하니 어머니 일 나간다

중산간 마을 신흥리 동백 씨 여무는 소리

한 생애 빈 가슴 같은 바구니도 따라간다

 

못 올라갈 나무라고 쳐다보지도 못할까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길 가던 현씨 삼춘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4·3 때도 마을은 그렇게 흔들렸다

숨어 살던 하르방에게 건넨 고구마 몇 알

반세기 훌쩍 지나서 동백 씨로 떨어진다

 

 

 

 

홀어멍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 신산리에 느닷없는 돌덩이 하나

그 누가 어디를 보고 홀어멍이라 했을까

 

홀어멍돌 보일라, 남향집 짓지 마라

집 올레도 바꿔놓곤 남근석처방이라니

갯가의 땅나리꽃은 땅만 보며 피고지고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 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얼결에 혼자 된 어머니

가슴에 섬이 하나

 

 

 

 

벼락맞을 나무

 

 

벼락 맞을?

벼락 맞을!

저기 저 나무 좀 봐

새소리 쏟아내는 곶자왈도 아니고

목마장 목책에 갇혀 종마나 지키다니

 

누가 메어놓은 오름, 오름 그 너머로

말 하나 나무 하나 가을 끝물 사랑도 하나

서로가 서로에 기대 풍경이듯 아닌 듯

 

땡볕이나 가려주고 등이나 긁어주지

팔자도 그런 팔자, 벼락 맞을 나무라니

나는 또 누구를 위한 피뢰침이나 될까 몰라

 

 

 

 

마량항

 

 

탐라와 강진 사이 뱃길올레 있었다지요

탐진이란 지명도 그래서 나왔겠지요

수평선 넘나들이가 쉽지만은 않았겠어요

 

천년 뱃길 종착지가 마량항, 여기라네요

육지와 제주 사이 가로막은 출륙금지령

이백 년 그 세월에도 말은 공출했다네요

 

하늘길 땅끝길 돌아 그 항구에 와 보니

말은 서울로 가고 말 모는 소린 제주로 가고

발밑에 밀려온 까막섬, 먹물빛만 번지네요

 

 

 

 

테우리막

 

 

진구슬목장 언덕받이 바람의 거처가 있다

돌담이 헐리고 지붕마저 내려앉은 채

온종일 소 울음으로 나부끼는 돌집이 있다

 

아버지는 테우리*, 이레마다 번을 섰다

19751210일 일기장 어느 한 쪽

며칠째 못 찾는 소야

얼룩이 묻어 있다

 

어느 가을 딸아이 교사 첫 임명장 받은 날

소테우리 말테우리보다 사람테우리가 더 어렵다던

그 바람, 테우리막에 한동안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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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을 뜻하는 제주어.

 

 

    *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12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