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과 고구마
가을 햇살 팽팽하니 어머니 일 나간다
중산간 마을 신흥리 동백 씨 여무는 소리
한 생애 빈 가슴 같은 바구니도 따라간다
‘못 올라갈 나무라고 쳐다보지도 못할까’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는 등 뒤에서
길 가던 현씨 삼춘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4·3 때도 마을은 그렇게 흔들렸다
숨어 살던 하르방에게 건넨 고구마 몇 알
반세기 훌쩍 지나서 동백 씨로 떨어진다
♧ 홀어멍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 신산리에 느닷없는 돌덩이 하나
그 누가 어디를 보고 ‘홀어멍’이라 했을까
홀어멍돌 보일라, 남향집 짓지 마라
집 올레도 바꿔놓곤 ‘남근석’ 처방이라니
갯가의 땅나리꽃은 땅만 보며 피고지고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 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얼결에 혼자 된 어머니
가슴에 섬이 하나
♧ 벼락맞을 나무
벼락 맞을?
벼락 맞을!
저기 저 나무 좀 봐
새소리 쏟아내는 곶자왈도 아니고
목마장 목책에 갇혀 종마나 지키다니
누가 메어놓은 오름, 오름 그 너머로
말 하나 나무 하나 가을 끝물 사랑도 하나
서로가 서로에 기대 풍경이듯 아닌 듯
땡볕이나 가려주고 등이나 긁어주지
팔자도 그런 팔자, 벼락 맞을 나무라니
나는 또 누구를 위한 피뢰침이나 될까 몰라
♧ 마량항
탐라와 강진 사이 뱃길올레 있었다지요
탐진이란 지명도 그래서 나왔겠지요
수평선 넘나들이가 쉽지만은 않았겠어요
천년 뱃길 종착지가 마량항, 여기라네요
육지와 제주 사이 가로막은 출륙금지령
이백 년 그 세월에도 말은 공출했다네요
하늘길 땅끝길 돌아 그 항구에 와 보니
말은 서울로 가고 말 모는 소린 제주로 가고
발밑에 밀려온 까막섬, 먹물빛만 번지네요
♧ 테우리막
진구슬목장 언덕받이 바람의 거처가 있다
돌담이 헐리고 지붕마저 내려앉은 채
온종일 소 울음으로 나부끼는 돌집이 있다
아버지는 테우리*, 이레마다 번을 섰다
1975년 12월 10일 일기장 어느 한 쪽
‘며칠째 못 찾는 소야…’
얼룩이 묻어 있다
어느 가을 딸아이 교사 첫 임명장 받은 날
소테우리 말테우리보다 사람테우리가 더 어렵다던
그 바람, 테우리막에 한동안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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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을 뜻하는 제주어.
* 김영순 시조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 (시인동네 시인선12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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