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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4)

by 김창집1 2023. 12. 2.

 

 

범벅을 아는 당신이라면

 

 

만만한 메밀가루 한 줌으로 뭉뚱그린 끼니

 

범벅 중에 범벅은 식어도 괜찮은 고구마범벅

빈속으로 쑥쑥 크라며 겉과 속 다른 호박범벅

참다 참다 배고플 땐 감자 듬뿍 감자범벅

아무 생각 없을 땐 무로 쑤는 무범벅

눈물방울 보일 땐 당원 한 방울 범벅

떡도 밥도 죽도 아닌 덩어리로 배 채우며

어려 고생은 약이라고 달래시더니

 

, 그게 역경이라면 오늘은 땡초범벅을

 

 

 

 

ᄒᆞ다 ᄒᆞ다

 

 

수백만 송이송이 귤꽃 터지는 오월

 

사나흘 밤낮 공들여 다섯 꽃잎 펼치고

 

가운데 노란 점 하나에 온갖 치성 들이는 봄

 

ᄒᆞ다 ᄒᆞ다 어느 한 잎도 아프지 말게 해줍써

 

ᄒᆞ다 ᄒᆞ다 눈 맞은 사름 만낭 시집 장게 보내 줍써

 

비ᄇᆞ름 맞당도 남앙 곱게 익게 해줍써

 

 

 

 

오몽 예찬

 

 

오몽해사 살아진다 오몽해사 살아진다

 

말해 뭐하나 돈도 자식도 있으면 좋지

 

경해도 지 먹은 오몽은 해사

선배님들 십팔번

 

하루살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누네누니추룩

일이 밀리 몸으로 지하 건설하는 게염지추룩

방앗간 그냥 못 지나는 밥주리생이추룩

 

사는 건 순간순간 대체불가 몸의 노릇

묶을 것도 밑줄 칠 것도 별반 없는 생애

오늘의 몸을 굴려서 내일의 몸에 닿는다

 

 

 

 

지읒 하나 차이

 

 

금자 영자 순자 명자 정자 옥자 복자 삼춘!

 

공짜 타짜 걸짜 가짜 몽짜 굳짜 판치는 데

 

ᄎᆞᆷ지름

ᄎᆞᆷ외

ᄎᆞᆷ메역

ᄎᆞᆷ깨

ᄎᆞᆷ으로만 주시는

우리 삼춘

 

 

 

 

ᄋᆞ

 

 

우주가 우주 밖으로 쏘아올린 씨 한 톨이

반쯤 핀 꽃잎처럼 입을 열어 ᄋᆞᄋᆞᄋᆞ

지구를 백 일쯤 돌아 처음으로 터트리는 소리

 

할머니가 ᄋᆞᄋᆞᄋᆞ 하면

아기가 ᄋᆞᄋᆞᄋᆞ

ᄋᆞ가 옹알이 되고 옹알이는 말이 되어

할머니 나 사이에는 오래 ᄋᆞ가 살았네

 

두 팔 벌려 안아주던 설문대할망 품의 소리

니 하다가 휘파람처럼 날아간 소리

우주가 태어날 때마다 여전히 ᄋᆞᄋᆞ는 들려

 

 

         *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