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슈탈트
꿈은 바늘이에요
잠든 여러 ‘나’를 밤마다 꿰매죠
조금씩 나는 ‘나’에게서 물들어요
기시감은 문양처럼 내게 새겨지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무겁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훼손돼요
바늘에 끅끅 눌려 길어지는 밤 울지 않아도 돼요
꿈이 바늘인 걸요
고작 내가 짝퉁이 되어가는 것뿐인 걸요
테두리가 뭉개진 화면
눈물처럼 번진 얼굴들
부어오른 기억의 표면
애가 끊어지고 목 놓아 울고 둥둥 떠다니고
잃어버린 것이 기억이 나지 않아
손발이 묶인 내가 ‘나’를 뒤틀고
넌 무얼 바라보는 거지? 그토록 까맣게.
꿈의 각막에 선율이 쏟아져요
흑백의 음률이 발목에서 찰박이고
나는 녹아 없는 빛깔로 일렁이다 침전돼요
깨어난 나는 가슴을 쓸며 바늘을 숨겨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아직 내가 다 돌아오지 못했는데
나는 ‘나’로 굳어가요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비대해지고
그러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모호해요
♧ 상가임대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모래성을 쌓는데 노래
내 그림자를 적실 수 있는 건
웅크린 나의 눈물
축축한 평행
등 뒤엔 미로가 남는다
모두가 답을 눈치챈 수수께기가
노랗게 노랗게
막힌 골목에서 펄럭인다
노란 두꺼비는 맹독을 가졌단다
소원은 쉽게 뱉는 게 아니고
소문은 쉽게 생각해선 안돼
노란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알맞게 노릇노릇한 노래
낮의 신기루들이
노랑노랑 날아다닐 때
쇼윈도 소문도 꼭꼭 숨어
쉿, 머리카락 보일라
맛있는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 박스 집
우리는 집 없는 집고양이
달아날 데가 없어 잔뜩 웅크리지
자꾸만 죽어도 살아나는
목숨이 아홉 개인 우리는
전생에 대해 노닥거리지
출구 없는 연옥의 열기에 대해
전생을 씻는 호수의 시린 안개에 대해
한낱 인간 위에 군림하던 시절에 대해
저들은 우리의 개안開眼을 보지 못하지
저들의 실눈에 우리는 그저
젖가슴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다 큰 아이들
경계의 가여움이 염색체인 아이들
그러니 더욱 발톱을 감추고 납작해져야 해
울음을 참고 들키지 말아야 해
우리에겐 단지 스쳐갈 生
불행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뭘 잘 할 수 있을까
무릎을 맞대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지
서로의 멍을 핥아주며
잊을세라 남은 生을 노래하지
웅크린 박스 안에서
잠글 수 있는 건 너절한 단추와 파란 심장
우리는 집 없는 집고양이
밤마다 웃으며 추락하는 꿈을 꾸지
♧ 우리는 지기만 했다
아버지는 장마철 이부자리였다가
마당 구석, 장막으로 가린 병무덤이었다가
개미가 되어서는 살짝 걷힌 장막 사이
빈병 입구를 빙그르 빙그르 돌았다
우리는 슬쩍 곡선이었다가
수직으로 떨어졌는데
이미 죽은 후에도
깔깔깔 웃을 수 있어 흐뭇했다
마당에 앉아
녹색 창이 벗겨진 대문을 바라보면
침몰된 내가 해초와 함께 흔들렸는데
숨을 오래 참는 날엔
붉은 피가 또륵 또륵 쏟아졌다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사라진 아버지는
홀수를 좋아했는데
홀수 같은 아이가 사라진 날
오래된 벽지처럼 바랜 나에게
아버지는 술상을 차려주었다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生인데
기억은 주검을 삼킨 잎들처럼
검푸르고 빈번했다
오후가 느려질 때
달려오는 것들을
나는 좀처럼 이길 수 없었는데
까만 개미는
자기보다 더 큰 핏방울을
또륵 또륵 쏟으며
저물도록 빙그르 돌기만 했다
♧ 폭설주의보
버스가 생크림 케이크 사이를 달려요 눈벽 같은 크림 위에 달을 닮은 달걀노른자가 터질 듯 떠오르면 혼자인 내가 찰나의 식탁에 초대 되죠 종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번호로 분류되던 벌레는 거인의 무릎에 기어올라 따뜻한 스프를 홀짝여요 커다란 거인의 손바닥 안에서 수프 한 스푼에 더듬이가 잠들고 수프 두 스푼에 가슴이 길어지고 수프 세 스푼에 향긋한 기억이 스쳐가요 차창 밖 눈꽃들은 노곤한 겨울 동화처럼 서늘하게 서 있고 나는 진작에 나를 잃었다는 걸 직감해요 나는 내가 모르는 소원만 읊조리는 멍청이인 걸요 유행가가 달걀노른자를 터트리면 폭삭 꿈이 내려앉고 폭설 속 버스는 혼자 맞는 생일처럼 느리게 흘러가요
*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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