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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제주시조' 2023 제32호의 시조(1)

by 김창집1 2023. 12. 6.

 

 

                        -독자의 픽Pick 시조

 

 

가을산행 - 강상돈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 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으로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부재호(제주문화예술진흥원장)

 

 

 

 

동행 강애심

 

 

세모와 네모가 만나

찌르고 상처 내며

 

보글보글 톡톡톡

부부의 긴 여정

 

살다가 살아지다가

술 익듯 익어간다

 

                               *현달환(뉴스N제주 편집국장)

 

 

 

 

간출여 - 강영임

 

 

숨었던 바위는 바닷물이 밀려나면

 

물 밖 세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은밀히 옷으로 덮인 당신의 등처럼

 

아물고 덧난 자리 흉지다 굳어지듯

 

오십여 년 쏟아지는 세상의 부하들을

 

오롯이 굼뜬 등으로 받쳐내던 옹벽 하나

 

희멀건 런닝 속에 툭 불거진 내밀함이

 

어느 날 문득 기억 속에 쏟아질 때

 

물 위로 솟아오른 등이 어혈 맺듯 붉어진다

 

                                       *부용식(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연구과장)

 

 

 

 

내 사랑 한림항 - 고성기

 

 

내 사랑 한림항은

물빛보다 추억이 더 파랗다

 

조개 잡던 순이順伊 보조개 물들면 다 잠기고

고깃배 두서너 척 꿈을 가득 싣고 떠나면……

실어증失語症의 바다

비양도 등대는 깨어 별이 되어 날고

물나면 낚시 드리워 시어詩語 두어 개 낚아 올렸다

 

나이는

방파제로 누워

흰 파도만 삼키는가

 

                               *양민숙(시인)

 

 

 

 

플루트와 그녀 - 김연미

 

 

플랫과 샵 사이 붉은 입술 내밀어요

하고 싶은 말들과 듣고 싶은 말들 사이

단단히 침묵한 당신

나를 받아줄래요

 

원초적 본능 같은 소리의 공간

손가락 행렬들로 비밀번호 풀어요

다장조 해류를 타고

당신에게 갈게요

 

오케스트라 협주곡 2악장을 넘어가요

반짝이는 음표들이 윤슬처럼 흐르면

생머리 그녀의 사랑

수초처럼 자라요

 

                                   *장중식(시인, 중부매일신문 기자)

 

 

 

 

유리 거미 김영기

 

 

암벽 타기 호사도

빙벽의 꽃도 아니

 

허공에 외줄 타는

남사당 춤도 아니

 

차가운

유리벽 위에

비문 쓰는

왕거미

 

                          *한문용(함덕문학회 회장)

 

 

                *제주시조시인협회 편 제주시조2023 3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