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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5)

by 김창집1 2026. 3. 21.

 

♧ 선글라스

 

선글라스를 싫어했던 것은

태양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색안경 끼고 보지 말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뿐

음흉스럽다느니 간첩 같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강박관념으로 작용했을 뿐

빛나는 태양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햇빛이 강하면 창문에 커튼을 지듯

세상 모든 것들을 모두 받아 안으려 말고

편광 필름으로 필요치만 받으면 될 것을

눈 찡그리고 태양을 볼 일인가

속상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일인가

렌즈를 통과해 들어온 태양은

적당히 빛나고 있었고

비로소 온전한 세상이 보였다

 

 

 

♧ 백야白夜

 

밤을 하얗게 새웠다

겨울밤이 길기만 한데

딸의 대학 합격 소식에 기쁘기만 한데

하얗게 보낸 밤이 벌써 며칠째

봄이 되어

저 산꼭대기 눈이 녹으면

딸이 그리던 대학에 가려면

내야 하는 등록금이 800만 원 정도

나의 두 달 치 월급이라는데

기네스 세계 기록에 소개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

셀라토의 뺘쿠야'(백야, 白夜)

 

메마른 가슴이 녹아내린다

 

 

 

♧ 구름을 알려주세요

 

지금 하늘이 파란가요?

파랗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혹시 하늘에 구름이 있나요?

구름을 알려주세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구름이 궁금하네요

하얀 구름은 포근한 솜털 같다고 하더군요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고 하는데

구름은 어떻게 생겼나요?

 

궁금한 나에게 도우미 선생님이

솜사탕을 주더군요

솜털구름이라 했어요

달콤했어요

손으로 조금씩 뜯어먹었더니

손가락이 끈적끈적했어요

 

구름을 알려주세요

딱딱한가요?

말랑말랑한가요?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하늘에 떠다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구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세요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하늘에 구름이 떠 있네요

뭉게뭉게 피어오른 저 구름은

제가 어릴 때 만지작거리던

어머니 젖가슴 닮았네요

만지면 포근해지는 그 느낌일 거예요

 

 

 

♧ 귓속말

 

바둑은 수담이라고 하는데

손으로 하는 대화란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수화처럼 손으로 이야기합니다

손짓에 몸짓을 더하여 바둑을 가르치는데

슬픈 표정으로 문 씨는 입과 귀를 가리킨다

친구의 귀에다 입을 대고

조고조곤 말하면

까르르 웃는 친구 얼굴이 보고 싶었단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여

손짓에 얼굴 표정으로 말하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멀뚱히 쳐다보며 가는 게 싫었다고 했다

농아복지괸에서 수업을 듣는 문 씨는

귓속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묵묵히 바둑을 두지만

앞사람과 재잘재잘 말을 하고 싶다는

문 씨 앞에 놓인 바둑판에는

들리지 않는 바둑돌 소리가 요란하다

 

 

 

♧ 이력서

 

이력서를 쓴다

어두운 과거는 다 지우고

상처는 지우고 상 받은 것 쓴다

따놓은 자격증 찾아보고

여기서 일하고 저기서 일하고

잘한다 소리 들었던 것

하나하나 세세히 써 내려간다

 

학교는 어디 나왔다고 쓸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 지우고 대학교만 쓸까?

혹시 심사위원들과 학벌로 인연 될까

다니지 못한 유치원도 다녔다고 쓸까?

 

살아온 반평생이

종이 한 장으로 정리되니 슬프다

구인란에 다른 것은 다 배고

당신의 미래를 쓰세요 하는

미래설계서가 필요한 세상은 언제 오나?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