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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 보나'의 시(완)

by 김창집1 2026. 3. 19.

 

♧ 움딸*

 

내 몸의 물을 간직할 섬이 있다

 

몸에 찰싹 달라붙어

물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면

물이 태어난 밤이 환해진다

 

고백은 어둠을 오래 쓰다듬게 한다

 

물 없이도 눈빛을 섞을 수 있고

물 없이도 울음을 섞을 수도 있지만

 

상처가 몸의 중심이었다

 

숨보다 깊은 물은

상처에서 연록 잎을 돋게 하고 나무를 만든다

 

발끝부터 몸을 거슬러 오는 물의 속살을

밤새 부벼 주는 섬

 

몸의 물빛을 닮은 빰이

겹겹이 감싸진 섬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물결무늬 검은 나비가 홀로 바다로 간다

 

---

*출가한 딸이 죽었을 경우 사위와 재혼시키기 위하여 얻는 수양딸.

 

 

 

♧ 상선약수上善若水*

    -목시묵굴 **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이 어디 있을까

고랑창이든 마른 땅이든 피하지 않고

흐르다 다른 물을 만나면 다투지 않고

더욱 유연한 몸짓으로 흐른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의 결도 모르고

성미대로만 막아 놨다고 물이 사라지지 않지

등글게 고여 살 냄새로 전해져 오고

사랑을 잃어도 노래는 남아 뿌리에 스민 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데

물이 유일한 마음으로 남은 봄날

물의 냄새를 맡으며 온 산이 숨 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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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

** 4•3 사건 당시에 선흘리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를 피해 은신했던 곳.

 

 

 

♧ 통개* 신방

 

반 깨진 통개에 겨울 눈 녹은 물

여름 장맛비 서로 꼭 붙어 있더니

검정 말, 마름 낳고 수련, 연꽃도 낳았어

사냥개 사납게 우짖던 밤, 천둥 벼락 치던 밤

아무도 모를 물의 내통을

푸른 아침이면 동네 사람 다 알아

물 부부 부끄럼 타는 소리를 통개만 들어

제가 치른 일처럼 낯빛 볼그레 불그레

통개 내려다보던 오디나무 캐득캐득 웃으며

오디 열매 퐁퐁 떨어뜨리자

물 부부 오디 물 같은 밤인 줄 알고 물결 찰랑찰랑 치니

통개 화들짝 놀라 실금이 갔지

유월 내내 오디 떨어지는 동안

통개 실금 가는 소리를 개구리만 들어

가을 가기 전에 또 어디로 헤엄쳐 가나

갈 곳 찾아 눈터질 듯 운다

 

---

*'항아리‘의 제주어.

 

 

 

♧ 수평선으로 가자

 

바다는 바다일 뿐

누가 너의 바다를 높게 불러도

낮게 불러도 너의 바다는

바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검은 물이 흐르는 환부를 정면으로 보아라

누가 잰 깊이로 가늠해서 물에 들지 말아라

갈 데까지 못 가 털썩 주저앉아도

바다는 바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다에서 아침이 시작되어

장미를 피우다 가시넝쿨 같은 태풍만 남은 밤

네가 겪은 바다는 너를 겪은 바다는

쓸쓸함, 깨문 입술, 갈매기 사체를 지났을 뿐

파도로 겨누지 않는다

 

누가 바다에 슬픔을 던져도

의심을 던져도 송곳을 던져도

네가 겪을 바다는 너를 겪을 바다는

고여 있는 순간이 없다

바다는 바다일 뿐

바다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마을에서 종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 그림자 시인

 

혀로 어둠과 고요를 섞어 빛을 만들어

울음이 훤히 드러나는 빛에 얼굴도 드러나게

드러나는 만큼 두 배의 어둠을 앞발로 모아

 

길고양이는 위험한 곳에서 안전해

골목 안에 골목 바람 빠진 타이어 안에 타이어

무엇이든 깨진 소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할 것 같은 장소

온기와 온기가 붙어 걷던 걸음이 해어지는 장소에

돌진한다 길고양이로 남기 위해

 

사랑하는 시간이 길면 무기력해진다

낮과 밤 구분 없이 흔한 하루를 되풀이하듯 내뱉는 사랑

백 년 후 겨울 따뜻한 창 안에서 하안 눈을 맞이한다면

나는 무엇으로 두근거릴까

지금부터 사랑하지 않겠다

 

길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어서 좋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낮은 자세로 재빨리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온 골목을 자신의 추위로 가득 메우고도

영영 돌아올 생각 없이 더 깊이 찾는 외로움

사다리 위로 부서진 난간으로 아슬아슬 혼자

고양이가 아니어서 좋은 길고양이 언어로

 

나는 돌진한다

시간은 가도 달은 지지 않는 밤을 할퀴는 상상을 물고

매일 다른 어둠으로 갈 수 있는 외로움 항해

사랑이 아니어서 좋은 이별

갸르릉 꼬리를 바짝 세운다

 

 

 

♧ 예고편

 

서랍장을 장만했다

뻣뻣이 굳은 다리와

벌겋게 녹슨 아버지를 공구처럼 가지런히 눕혀

 

어느 해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아주 가끔 아버지 손이 필요했으나

서랍을 열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멀건 죽 같은 말로

느리게 시계만 닦는

어둡고 습한 것을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청소를 하다 기침을 하면

묵은 계절 옷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로 밟아 잘게 부수면

먼 나라 이름처럼 낯설었다

물속에 몸이 빠진 꿈을 꾼

어느 해 구석

서랍을 열었다

어루만져 본 적 없이 먼지만 쌓인 통증들

알코올에 닦이고 있었다

 

가족들 누구도 서랍장이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더 넣을 수 있는 것들을 물어본 적은 있었다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 보나』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