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벌레먹은 배추잎 – 강봉수
몇 줄 되지도 않은 이랑을 올려 배추를 심었다
연두연두한 잎들이 어랑어랑해졌다
속이 차면 배를 갈라 겨울을 나리라
없던 꿈까지 푸르러졌는데
아뿔싸 한눈파는 사이 난리가 났다
잎사귀마다 창문이 숭숭
펑 뚫린 구멍 사이로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이 노릇을 어떵허리 어마 어떵허리
김장은 다해 먹었다 설러먹었져
내입이가난해도다른생명이풍족했다면내수고가헛되지않았으리
내입도알고보면다른이의땀흘림덕에호사를누렸으니
나무라지 마시오

♧ 오빠 생각 – 김수열
-북촌 옥화
70년 세월 흘러 4•3 시절 북촌 당팟
어머니는 우리 4남매 치마폭에 싸안고
3대 독자 우리 아들, 오빠만이라도 살려달라 소리쳤지요
그날 어머니 죽고 언니 죽고, 총 맞은 동생은 얼마 없어 죽고
오빠는 고아원에, 나는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졌지요
세상 달라져 4•3 희생자 보상도 나오는데
우리 부모님은 혼인신고가 안 돼서
호적에는 큰아버지 자식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 아버지는 내게 삼촌이 돼버렸지요
그래서 옥화는 부모 형제 핏줄 찾아야겠다 해서
유전자 검사도 하고, 결국 아버지 딸로 입적이 됐는데
어머니는 이북 청진에서 홀로 내려와 여긴 아무 근거가 없다 하네요
그래도 내 죽기 전에 어머니 호적을 찾아
아버지와 죽은 혼인 신고를 하려 합니다
그래야 그때 당팟에서 죽은 언니, 동생도 자식으로 인정돼
드디어 한 가족이 된다 합니다
오빠, 저도 이제 84살입니다.
머지않아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언니와 동생이 있는
가족 옆으로 가겠지요 너무 걱정 마세요. 곧 갈게요.

♧ 허물(虛物) – 진하
나는 어설픈 허물이다
거짓 세상의 피부에 돋아난
작은 상처의 두드러기다
어떤 우연과 실수의 산물
어쩌면 비웃음을 살 만한
서투른 소행의 흔적이다
속앓이로 부풀어오른 물집
맑은 눈물 가득 찬 주머니
아니, 가득히 빈 주머니다
아니, 속이 마른 눈꺼풀이거나
나비 한 마리 빠져나간 껍질
자꾸만 따가운 마른 살갗
충만의 기억을 담은 빈 거죽
뜨거운 살갗에 허옇게 일어나는
나는 가렵고 따가운 부스럼이다

♧ 꽃무릇의 노래 – 장영춘
한 줄기 빛을 따라 허공을 나아가네
엇갈린 운명 딛고 스스로 길을 열어
붉은 꽃 흩날리면서
너는 길이 되었다
허허벌판 잎도 없이 잠시 머문 생이지만
꽃 진 뒤 뿌리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비바람 세차게 불어도
그 이어짐을 알리라
멀리서 손 흔들며 영원을 건너가듯
잎의 향기 속에 그날을 품은 채로
내일도 네 노래 부르며
오늘을 살아가리

♧ 헌마공신 김만일 – 조한일
따라비오름 능선 따라 휘날리는 말갈기
가시리 갑마장길 억새밭 사이 만일의 숨결
말들이 임진년 병자년 전란의 바다 넘는다
본토가 짓밟힐 때 절해고도 제주에서
천삼백 군마 혈육과의 별리처럼 목이 메도
1꺼 이 되로 달라면 말로 주는 말테우리
벼랑은 상처 난 철쭉 지나치는 법이 없고
남녘 섬은 전장의 육지 배신하지 않는다
고삐가 당겨진 노을 녹산로를 질주한다
*계간 『제주작가』 겨울호(통권 제9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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