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할머니의 구절초가 핀다 – 최은숙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길섶을 만들었다
꽃들도 내리지 않은 질퍽한 땅 위에
무슨 말 필요했을까? 울다 지친 흙탕물이다
사랑 한번 못해본 소녀들이 어둠 속에 흘렸다
구절초 꽃잎들이 밤낮 상관없이 떨었고
눈 감고 귀를 닫아도 오장육부는 뒤틀렸다
살아라 죽고 싶어도 끝까지 살아라
탕탕탕 울려오는 소리 가슴에는 천둥이 친다
어머니 저 못 살겠어요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상처에 상처를 입고 어디까지 흘러왔을까?
시간이 지났어도 푸르른 그 눈동자
깊숙이 박힌 못들이 눈빛 속에 환하다

♧ 그해 겨울의 파흔 – 강영미
사뿐히 발 디뎌도 자꾸 지워져 갔네
한모살 가슴팍에 길게 쓰여진 파흔
바다를 밀어내면서
그해 겨울을 읽었네
팔월 땡볕을 넘겨도 목구멍이 서늘해
젊은 사진으로 남은 할아버지 발자국
여길까, 저기였을까
칠십칠 년 묻은 자리
진실을 비켜선 건 바다가 아니었네
마주 보지 못한 자의 짜디짠 침묵 같은
물거품 쓸어 버리며
다시 쓰고 있었네

♧ 간절기의 말 6 – 강은미
-단추 한 알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
사람 드문 숲에 안개처럼 고요히 스며들면
아직은 살얼음인 듯 서로 낯설고 서먹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 계절에 떠나서
살갑지 못했던 손길을 자꾸 매만지게 하는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화살나무 가지 끝에
내 마음의 방향을 닮은 서릿발 하나가
마지막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로 남아
장태코 서쪽 능선의 피 울음을 증언하네

♧ 노모의 웃음바다 - 고혜영
까르르 까르륵 물새가 노래하듯
아흔다섯 어머니는 그렇게 웃으신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물보라 피어난다
그 바다 언저리에 열다섯 봄이 돋고
“혜영아, 나 너 좋아!" 친구가 돼버린 딸
어쩌다 눈 마주쳐도 얼굴 감싸며 까르르
나이는 들었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
지워진 수평선에 바다 품은 해녀 마음
어머니 웃음바다에 해초들이 자란다

♧ 마주보기 – 김미영
투명한 마음처럼 햇살 든 창문 앞에
여섯 살 아들 같은 어랑어랑 질경이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창문 톡 톡 두드린다
한 걸음에 이파리 하나 아장아장 담쟁이
눈빛 시린 유리창에 얼굴 딱 붙이고
열어 봐 나 여기 있어 마주 보고 웃는다
*젊은시조문학회 간 『돌돌돌 흘러온 시간』 (한그루, 2025)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자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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