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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3. 12. 17.

 

 

가을 장미 이상호

 

 

말하자면 붉고 노란 아름다운 것들이

가끔은 가랑비 설킨 설음이어도 좋으리

말들이 자글거리는 입안에서라도 좋으리

 

문신처럼 새겨져서 창밖에서 흔들리는

이 밤만은 단둘이 아니라도 좋으리

질기게 기대어 서서 눈물 나게 울어도 좋아

 

선잠 깬 새벽거리에 가시 하나 품고 서서

상처 하나 길게 내 놓고 미음 끝 뒤에라도

기억에 사라지지 않게 가지 하나 내밀어 다오

 

 

 

무두불無頭佛 - 김세형

 

 

길 없는 길을 찾아

경주 남산 용장골 깊은 산곡山谷을 오르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낮부터 이튿날 새벽녘까지 어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캄캄한 잡목림 속을 헤매다 잡풀 더미 속에서

좌정에 든 머리 없는 돌부처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길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머리 없는 돌부처가 대답했습니다

머리를 내어놓으라고-

그제야 번뜩 길이 보였습니다

돌부처 가슴에서 아침 햇살처럼 길게 내 뻗은

눈부신 마음의 길을-

 

 

 

 

바람의 공양 - 유성임

 

 

바람을 체를 치듯 소쿠리가 흔들거린다

절간 마당 밤나무 밑에서

얼마큼의 바람을 골랐을까

수없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는

촘촘한 구멍 사이로 바람이 끝이 너덜거린다

문득 소쿠리 속이 궁금했고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안에는

가지에서 낙하한 바짝 마른 밤 잎 서너 개

먼 곳에서 등 떠밀려 왔을 은행 나뭇잎 한 개

속세에서 따라온 작은 비닐 한 조각

 

잡다한 마음 비우려 왔더니

머리가 헝클어진다

놀란 풍경소리에

경기를 하듯 소쿠리는 또다시 바람을 체질하고 있다

 

 

 

 

카르페 디엠 1 여 연

     -흐르는 대로

 

우는 사람 울게

웃는 사람 웃게

 

가는 사람 가게

남는 사람 남게

 

둘인 사람 둘로

혼자인 사람 홀로

 

취한 사람 취한 채

자는 사람 잠든 채

 

멈출 사람 멈추게

행할 사람 행하게

 

역적은 역적으로

충신은 충신으로

 

사람은 둘로 나뉘어

서로의 가슴 겨누어

 

땅은 반에서 반으로

나무도 반에서 반으로

 

새들도 꽃들도 날거나 피거나

우리도 너희도 피거나 말게나

 

 

 

 

가을의 버킷 리스트 허향숙

 

 

일 년에 한 번 나만을 위해 식탁 차리는 일

이름 없는 풀꽃 쭈그려 앉아 오래 들여다보는 일

가끔은 크게 웃어보는 일

혼자 별빛 헤아리지 않는 일

내 안의 슬픔 꺼내 보는 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 아래로 길 떠나는 일

찬바람이 슬어놓은 홍엽 바라보는 일

홍엽처럼 어느 날

곁가지를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는 일

 

 

                      *월간 우리12월호(통권4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