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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8)

by 김창집1 2023. 12. 19.

 

 

거울의 화법

 

 

한 달이 멀다하고 서울을 가는 친구

일이나 여행 아니라 휠체어로 오간다

어느 날 한참 동안을 머뭇대다 끊긴 전화

 

보름쯤 지났을까 뜬금없는 카톡 사진

지하철 스크린도어 게시된 내 시() 몇 줄에

저기압 벙거지모자가 배경으로 앉아 있다

 

뽀샵하려 했는데못해서 그냥 보낸다

굳이 감추려던 민머리 그 마음 알겠다

세상의 그 어떤 고백도

대신하는 거울의 화법  

 

 

 

 

은행나무 밥집 김영순

 

 

허기를 모른다면 세상이 재미없다

 

제주 칼호텔 근처 반세기 비바람 속에

 

함석집 지붕을 뚫고 기둥이 된 은행나무

 

그 나무 품은 밥집에선 연애사도 출렁인다

 

의귀에서 시내로 유학 온 막내삼촌도

 

저 혼자 말 못할 고백, 단풍처럼 탔었다

 

여기도 코로나는 비켜가질 않는지

 

재작년엔 국밥집작년에는 정식집’.

 

올해엔 또 밥심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와글바글 발길들 다 어디로 흘렀을까

 

밥심만으론 못 막은 거저 노란 독촉들

 

몇 방울 가을비 핑계로 더 환하게 피어난다

 

 

 

 

나무는 지금 음악 감상 중이다

 

 

누가 왜

그랬는지

따지지 않겠다

 

퇴근길 가로수에 걸려 있는 CD 한 장

 

, 조용

나무는 지금 음악 감상 중이다

 

 

 

 

하늘 경전

    -한곬 현병찬 서실 먹글이 있는 집에서

 

 

서실 천장 붓글씨들 여름밤 별자리 같다

남두육성 견우직녀성 새로 생긴 어머니 무덤

서귀포 남녘 하늘에 꼬리별이 또 진다

 

어느 문하생이 못다 쓴 고백일까

스치면 인연이요 스며들면 사랑이라

누구의 말씀이신가, 별 스치는 이 밤에

 

괴발개발 살아온 길, 파지처럼 살아온 길

획 하나 점 하나 놓친 흠들은 흠들끼리

저렇게 어울려 있어

비로소 걸작이 된다

 

 

 

 

마타리꽃

 

 

오르막이 어렵다면 내리막은 쉬운가

연해주까지 따라온 중고버스 낙서들

한참을 빌빌거리다 기어이 서고 말았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설마, 이 땅에서도 빌붙지 못할까

툭 뱉는 가이드 말이 목에 걸린 가시만 같아

 

허허벌판 버려져도 뿌리째 흔들려도

내 본질은 야생화, 결코 기죽지 않는다

사랑아, 너도 그처럼 피고 지고 하여라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 사진 : 눈이 그린 난초(2023. 12. 17. 사려니숲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