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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6)

by 김창집1 2023. 12. 16.

 

 

먹는 동사

 

 

왜 이리 예쁜 거냐

서오누이 하는 짓이

 

엄지 검지 중지까지 합세해서 ᄌᆞ바 먹고

다섯 손가락 다 펴서 한 움큼 줴어 먹고

밥 밥 해도 밥은 국물 있어야 ᄌᆞᆷ앙 먹고

입맛 없을 땐 마농지 자리젓 ᄌᆞ창 먹고

짠짠한 감장된장 양념해서 ᄐᆞᆨᄐᆞᆨ ᄌᆞ가 먹고

숟가락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거려 먹고

짜고 달고 쓰고 신 건 물 담가 우려 먹고

먹음직한 건 입대서 덥석 그차 먹고

맛 좋은 국물은 사발째 호륵 드르싸고

풋콩 삶아주면 콩깍지 베르싸 먹고

 

어머니 눈엔 꿀 뚝뚝

다디 달던 그 시간

 

 

 

 

말은 낳아 제주로 보내랬다고

 

 

왓은 신의 공간이라며 탐낸다는 태국 말 중에

빌레왓 성굴왓 촐왓 담드리왓 무등이왓

만 팔천 신들이 고향 지명들이 남아서

 

무심코 튀어나와 쪽팔린다는 일본 말 중에

노가다는 똔똔이야 유도리 있게 왔다리 갔다리

막일은 본전치기야 여유부리며 왔다갔다

 

세상 애교스럽다는 프랑스 말 중에

가베또롱이 느보레 가젱ᄒᆞ민 아랑 졸디

가볍게 널 보러 갈 때 알아두면 좋은 데

 

받들어 모시는 만국공통이라는 말 중에

알바 핸 머니마니 인 시카코피자 쏘리 쏘리

조랑말 히잉 히히힝 말이 말 다 잡아먹는다고

 

 

 

 

말과의 이별 방식

 

 

게난 눈진벵인 진눈개비옌 ᄒᆞ고

쇠나기 ᄒᆞᆫ 주제 ᄒᆞ민 소나기 한 차례옌 ᄒᆞ고

놀 불민 태풍이옌 ᄒᆞ고

ᄀᆞ랑비 ᄀᆞ란 가랑비옌

 

말로 할 땐 끄덕끄덕 귀가 알아 듣는데

글로 써서 읽으라 하면 입이 버벅 버벅거려

그렇게 붉은 입술이 식어가는 거구나

 

 

 

 

작달비

 

 

내게 오시려거든

부득불 오시려거든

 

비비작작 비비작작

 

휘갈겨도 좋으니

 

한 줄의

시로 오소서

니체의 혼잣말처럼

 

 

 

 

빙세기를 아시나요

 

 

  소리를 죽인 꽃잎이 방긋 벌어지는 동안

  눈꼬리 입 꼬리가 마주 길어지는 동안

  그 잠깐 부드러운 순도에 얼음벽이 녹는다

 

  일천구백사십팔년 사월이십팔일 한수곶 살얼음 밤을 걸어내려 온 김달삼과 먼 생각 돌고 돌아온 김익렬이 만나서 세기의 담판을 짓는 구억국민학교에서도 여린 빙세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소가 방긋방긋 터지는 것처럼 빙세기도 빙싹 빙싹 얼음에 싹을 낸다 빙싹도 자란다는 걸 섬사람들은 알았지만,

 

  그렇게 그런 세기 살아낸 사람들이

  너나없이 빙세기를 가지고 가 버렸다

  아들 딸 재산 다 두고 친절한 미소도 두고

 

  몇 세기 더 살아야 빙세기 돌아오나요

  미소는 대놓고 돈이 되기도 하는데

  골동품 빙세기라면 한 세상 살 것도 같은데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