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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8)

by 김창집1 2026. 5. 23.

 

♧ 올레

 

큰형이 말씀하셨다

셋형이 말젯형에게

말젯형이 작은형에게

작은형은 또 내게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수직구조

캄캄한 밤길을 걸어

동네 점방으로 라면 사러 가는 길

커다란 팽나무가 드리워진

구불구불 골목이 으스스했다

 

짓궂게 구는 형들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어머니의 그늘이었다

밭에 일하러 간 어머니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발을 동동

어머니 빨리 와

어머니 빨리 와

어머니가 집으로 오는 올레는 길었다

 

지난 일 모두 추억이라

오랜만에 걸어보는 고향집 올레는

조금 더 넓어져

너무나 짧았다

 

 

 

♧ 슬픈 안부

 

누나 배가 이상해 쿵 소리 났어

누나 사랑해 그동안 못 해줘서 미안해

엄마한테도 전해줘 사랑해

3G도 잘 안 터져

나 아빠한테 간다*

 

4월 16일 오전 9시 35분에

발송된 문자에 답한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언제쯤 도착할까?

 

멀리 떨어진 남해안의 섬에서

바다를 향해 보내는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10년 동안이나 열어보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해마다 돌아오는 4월

바짝 졸아든 미역국이 너무 짜다

 

---

* 단원고 학생, 세월호 희생자의 마지막 문자.

 

 

 

♧ 빈자일등貧者一燈 1

   -꺼지지 않는 촛불

 

오늘도 작은 등불을 켭니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지만

쇠심줄보다 더 단단한 믿음으로

심지를 부여잡습니다

등불이 점점 모여듭니다

제주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광화문을 채우고

여의도를 채우고

온 나라 방방곡곡 밝힙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불빛을 흔듭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같이 살아가는 나라를 위해

생로병사 고뇌의 길 밝혀줄

작은 등불 켭니다

 

 

 

♧ 빈자일등貧者一燈 2

   -연등을 달다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큰길에서부터 수많은 등을 만나며

어두운 길도 외롭지 않을 거라 나를 위안합니다

종무소에 들러 작은 연등 하나 손에 들고

비어 있는 구석자리를 밝힙니다

등은 하나이지만

부부와 아이들 모두의 염원을 담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새해 첫날부터

큼지막한 연등을 가족 숫자만큼 달아

주렁주렁 한 해의 소원을 걸어 놓고

부처님 봐주세요 하련만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작은 등 하나 걸었지만

언제나 마음속엔 큼지막한 등불이 활활

타고 있음을 부처님은 아시리라 생각하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지만

마음속 꺼지지 않을 등을 걸어 놓습니다

 

 

 

♧ 빈자일등貧者一燈 3

   -촛불을 드는 이유

 

앞이 보이지 않는 내가 촛불을 든 이유는

당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나는 낮이나 밤이나 그냥 그렇지만

당신은 어두운 밤길

무심코 걷다가 나와 부딪칠 수 있으니

당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일이다

당신이 스스로 불을 밝히면 더욱 좋겠지만

어두운 길 해쳐나갈 수 있다 장담하는

당신

밤길 조심하세요

 

당신은 어둠을 핑계로 나와의 부딪힘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을 아는 나는 이렇게

촛불을 켜고 있어요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 (한그루, 20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