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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8)

by 김창집1 2026. 5. 20.

 

♧ 말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말 앞에서 우리는

전장에서 겨우 기어 나온 부상병 같았다

숨이 막혔다

 

승리… 절망…

익숙했던 단어들이 낯설었다

어둠 속 라이터를 튕겨도

불꽃은 깨어나지 않았다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소금 한 줌 뿌리듯 반발이 튀었다

 

곧바로 채찍 같은 말이 내리쳤다

“말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순식간에 말이 사이를 삼키고

머리 위 하늘엔 입구도 출구도 없었다

착각과 오만으로 엉긴 그림자만

휘청이며 춤을 췄다

 

함께 마주한 말도

사람 따라 반쪽으로 부풀거나

아집 속에 잠겨 버린,

씁쓸하고 이치를 갉아먹은 승리

 

“말조심…”

깊이 박힌 말만 밤을 삼키고

입을 조였다

 

눈길조차 바람에 흩어진 후

침묵이 서로를 무시했다

 

말조심으로 남은 것은

텅 빈 껍데기 하나

 

 

 

♧ 나이와 마주하여

 

염두에 없던 나이였다

하늘과 바다의 숨구멍인

별이나 고래를 키워 내겠다는 꿈,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고만고만하여

수사도 장식도 붙지 않았다

내일을 헤아리지 않은 채

익숙한 길만 걸었다

 

스스로 낮았던 만큼

세상도 낮았다

 

가끔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는 순간

오히려 감사했다

 

겨우 이제 사람을 배웠지만

한 사람의 끝까지는 알 수 없었다

 

꽃댕강나무 잔잔한 종소리

흩날리며 오래 머물지 않은 것처럼

 

친하게 다가앉은 저녁을

태워 버린 밤처럼

 

내 편이라 믿을 손도 없었다

 

융통성 없이 오도 가도 못하는 나를 지나

사람들은 햇살 속으로

점점 스며들고 있었다

 

뒤늦게 알았다 답답했던 이유,

수챗구멍을 틀어막고 앉아 있던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리를 비워 주는 것

 

비록 뒤처진 응달일지라도

바람이 흐르도록 내어 주는 일

 

해와 달이 스쳐 간 자리에

여태 남아 기다리는 나에게

새 이름이라도 지어 주고 싶다

 

고집으로 길들여진 미간의 주름 위에

슬몃 음표 하나 얹어

 

꽃이 피었을 때가 아니라

마른 꽃잎 매단 채

눈 맞는 어깨를

살짝 털어 주며 가는

 

그런 노래 같은 이름

지어 주고 싶다

 

그 이름을 안고

비워지도록

나 또한 조금씩

다시 쓰일 수 있도록

 

 

 

♧ 그믐을 견디는 일

 

봄 한철, 다시 어지러웠다

뿌리내리지 못한 나는

화분들을 하나둘 늘려 갔다

베란다에도, 사무실 창가에도

관엽 식물과 양치식물은 조용히 새잎을 틔웠다

 

선인장을 좋아하는 나는

사막까지 키웠는지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시절인연,

혼자 되뇌는 사람만 있을 뿐

 

한 사람을 잊기 위해

낮과 밤이 뒤엉켰던 그녀,

그날들을 의지하려던 새끼 고양이는

울음이 여물기도 전에 사라졌다

 

창가에 앉아 고양이처럼 울던 그녀도

섬 밖으로 사라졌다

 

문득, 그녀가 떠올라

삽목했던 천리향을 살리지 못한 빈 화분에

사철나무 줄기를 새로 심는다

 

흙을 덮으며

그믐의 시간까지 담는다

 

조심스레 키워 올릴 다짐 같은

속으로 스며드는 손길 같은

 

뿌리는 그믐을 견디며

조금씩 빛을 틔울 것이다

 

 

 

♧ 새벽

 

오가는 길, 나는 늘 혼자였다

어제 아침은 오늘 밤까지 이어졌지만

입술 위에는 하품조차 머물지 않았다

 

내 꼬리를 쫓는 생각처럼

같은 자리만 빙빙 돌았다

 

머리는 어지럽고 발밑은 흔들리며

숨은 달아나려는 듯 점점 빨라졌다

 

알은 체하던 이름들은

그 누구도 머무르지 않았다

곁눈질 없이 살아왔지만

십 년의 정도 끝내 곁을 지켜 주지 않았다

 

봄이 흔들릴 때야

비로소 마음이 스스로를 비우려 한다는 걸 알았다

 

살아내라고,

몸이 나를 깨운 것이었다

 

 

 

♧ 요일 이후

 

말뚝에 묶인 하루는 느리게 돌며

나를 무게 속에 가두었다

 

중심은 흩어지고

내 자리는 풀밭 끝처럼 멀었다

나를 모두 쓰고서야 겨우 줄이 풀렸다

 

그 흔적은 가끔 그늘을 품었지만

백수가 되어 오름을 타고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숨 쉴 길이 열린다

 

사람들의 그림자에 섞이지 않아도

이름이 희미해져도 편안하다

 

나무 아래 서면

새들과 햇살이 내게 모이고

잎맥처럼 뻗은 오솔길이 나를 맞이한다

 

느릿느릿 걷다 보면

몸과 마음 사이 열린 틈으로

말과 생각이 돋아나고

바위의 그림자 속에서도

눈이 천천히 깨어난다

 

바람도 누그러져

등을 쓰다듬으면

 

꽃이 아니어도

모든 생은

제자리에서 피어난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