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이 깊어 갈수록 – 부정일
온 나라가 파랗게 물들었다
이럴 수 있는 것이 민의인 걸 어이하리
고요한 바다 노 잃은 일엽편주는 균형을 잃어
별이 흐르는 하늘만 쳐다본다
백주에 달이 떠도 그러려니 했을 뿐
차마 파랗게 물들 줄 몰랐다
벚꽃은 피었다 떨어지고
순이네 뒤란 복사꽃도 봄비에 질 때
윤삼월 모란만 하얀 소복으로 피었다
어둠 저편 선구자는 어디메에서 서성이는가
내 나라, 붉게 번질 불씨 하나 품고 오시라
안타깝다면 쉼 없이 오시라
화란의 풍차는 튤립이 피든 안 피든
쉼 없이 물레를 돌리고
가마고도 당나귀는 휘청거리며 험지를 간다
조국의 미래가 가야 할 길에 있다면
기어서라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는 민의가 이끄는 대로
오만과 실패나 후회를 뒤로한 채 쉼 없이
장강의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흘러간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 한 발짝 - 양대영
저만치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자,
습관처럼 조금은 멀리 떨어져 걷습니다
정류소나 식당, 빵집, 편의점에서도
나 홀로입니다
가지치기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나무의 잎사귀들은 가까워지려다
또 멀어져 낙담했을지 몰라도
의연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띄엄띄엄 서 있던 나무들은
한 발짝 떨어져 있어도
더 깊숙한 곳에서
서로 뿌리를 맞대고 간지럼 태우다
새들을 날려 보냅니다
어깨동무하기도 힘든 세상,
한 발짝이 구원으로 다가오는

♧ 귤 따는 해녀 – 양순진
늦가을 새벽 그녀는 서귀포 귤 따러 간다 일당 주느냐고 했더니 주인이 지인이라 일당 대신 귤과 마음껏 대화할 수 있단다
정오 되자 천지간 비가 촉촉하다 서귀포 비 오느냐고 귤 못 따서 어떡하느냐고 전화했더니
서귀포엔 벳이 과랑과랑햄수다 귤 하영 탐수다
카랑카랑한 제주어로 귤밭 수놓는 그녀 동글동글한 얼굴에 슬픔 머금은 동그란 눈 열두 살에 해녀였다는 그녀는 물질로 귤을 따는 중이다 굽이굽이 물살 해치며 제 할 일 다한 순간을 이해하는 중이다 아니 자기를 해체하는 중이다
그래, 귤과 실컷 실마리 풀고 오세요
물질도 귤 작업도 초보인 나는 그녀를 통해 뒤늦게 배운다 마치 엄마와 아기 같이 우리는 서툴지만 끈끈하다 비와 햇살 사이 그녀와 나 사이 은빛 별들이 귤밭 돌담 구멍을 메우고 있다

♧ 정실 마을에 봄이 오면 - 정순자
꽃등 밝힌 여인들의 긴 행렬이 시작된다
바람 타고 술렁이던 연인들의 염원이
꽃잎처럼 날리는 길
깊은 겨울밤 호롱불 밝히며
한 땀 한 땀 수놓은 그리운 이름들
처음도 끝도 알 수 없는 무릉도원에서
월정사 스님의 청정한 목탁 소리는
이미 떠났지만 아직 보내지 못한 시린 가슴
색색의 꽃등 달아 환한 웃음으로 보내주는
벚나무 가지마다 눈부신 꽃들이 출렁이는
고향 찾은 이들 살며시 안기고 싶은 마을
봄빛 눈부셔 울컥 젖은 눈의 가슴으로
꽃등마다 볼 비비며 분홍 꽃밥 수북이 먹고 싶은
까르르 꽃잎 물고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이름들 하나하나 불러보며
연인들은 서로의 머리에 꽃잎 달아준다
맑은 영혼의 우물 같은 루이가페 정원에서
아이스라테 투샷을 마시며
비단 꽃길 따라 푸른 웃음 짓는 그대 따라
맨발로 연분홍 마을 걷고 싶다
비녀 꽂은 여인의 단아한 걸음으로, 소곤소곤한
정실에 봄이 오면

♧ 마음 배달 – 조선희
함께 있지 못해도
품으며 손잡지 못해도
마음은 배달이 된다
어느 날 배달된 작은 선물
딸이 만든 바스크치즈
부재중인 나를 위해 조심스레 넣어둔
냉장고 한 켠에 보관된 마음
담긴 사랑
한 조각씩 입에 넣으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낸다

♧ 몸 – 최원칠
꽃은 늘 그 자리에 피고
꽃 그림자 지고
핀 그 자리
제 모습 그대로 내려놓는데
한번 무너진 몸
몇 철 다 가도록
수습하지 못한 채
절뚝거리며 울고 있네
다시 꽃 피우듯
시작하는 걸음마
아마도 꽃은 피고 진게 아닐 거야
철없는 시간만 흘러
저물어 갈 뿐

♧ 철새의 꿈 – 현문길
땅거미 쓸고 가
어둠이 스멀거리는 하늘엔
총총거리는 별
하늘 담은 호수에 별이 잠기고
적막은 풀잎 스치는 바람에 일렁인다
산비둘기 울음 꾸욱 꾹 눌러 담아
별빛 흐르는 밤마다 별을 세는 새
술렁이는 푸새 소리에 놀라
긴 목 빼어 들고 휘휘 둘러보다
설친 잠 움츠려
더 깊숙이 빠져드는 꿈
내일은 돌아가야지

♧ 새해 – 홍연서
날이 밝았다 새날이 밝았다
겨우내 숨죽였던 묵은 고통을 털고
동창이 밝았다
시름 섞인 한해살이 출렁이던 마음의 파편들
줍자니 허공에서 매각질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사탕보다 달콤했던 능멸의 날들
인생의 바다에서 퐁당였었지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아이러니
만인의 새날이 밝았다
희번덕 눈을 뒤집어 새날을 안아보자
그리하여 일어나자, 깨어나자
*한라산 문학 제38집 『글왓에서 숨길 찾다』 (한라산문학동인회, 2025)에서
*사진 : 한라산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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