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강 강갑춘
능소화 타는 파란 대문 안에 그녀는 없다
파도치는 말들로 한마당 여름이 압사당하던 그나
연유를 풀기 전
수십 번 눈동자도 몸도 위로 아래로 움직이더니
목젖 아래 말이 웅웅 두루 섞이더니
어느 순간 폭포처럼 출렁하던 그 마당
어디로 갔나
젖은 눈동자 흔들리던 그녀 말 속의 말들
나뭇잎만 머리 위로 사르릉 사르릉 떨어져
차릉차릉 거욱대 위로 치잉치잉 와르륵 와르륵
아무 일도 모른 이파리들이
사람들 머리 위를 덮었어
퍼덕퍼덕 새처럼 앉았어
숨소리마저 은신처로 숨어버린
덤불숲도 끝내 소리를 참던 그날
차마 숨지 못한 목숨들 다락다락
외마디로 스러지더니
그때 아기 업은 여인이 스러지는 거야
죽은 어미 가슴팍 헤집던 아긴
어둠이 고랑을 삼킬 때까지
쪽쪽 꼬물거리더니
에미 죽고 아기 살았어
그 어디선 에미 살고 아기 죽던 그날 새벽이야
용강 전멸 시월의 그날
우리보다 더 멀리 간 사람들 다다다다
밀룽밀룽 어디론가 말처럼 달리던 봉아름 목장
많이도 스러지던 그날이야
사내 복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먼저 바다로 갔다는 그녀
혹시 지금도 그 검붉은 말 넘치는
용강마을 그녀 소리 출령거리나
나는 이따금 그녀 대문 안에 귀를 놓고 온다

♧ 밋밋, 살다보니 눈이 녹아서
-부순여
어디가 풀밭인지
어디가 사람의 길인지 몰라
눈은 그저 쌓이고 쌓여
생이지름* 없어서 왁왁한
동굴 입을 막았어
사람 입도 막혀버렸지
기어이 홀로 기어 나온 그 겨울
마을은 붉기에
달도 붉기에
정월에 총 맞고 시월에 타고
탄 바닥이 무서워 너무 무서워
대나무밭 쪼그린 늙은 목숨들 그 자리서 밋밋
계곡마다 아이 품은 엄마도 아기도 그냥 밋밋
창창창창 흐르는 붉은 물가엔
얼어붙은 이파리만 밋밋
복장만 안 맞아 살아난 엉클어진 소녀
업고 가던 동네 청년 총소리에 화들짝
내버리고 갔어
아무도 없는 빈 목장에 홀로 나앉아
찐 감자 볶은 보리 한 방울에 홀로 살았어
송장처럼 썩어가는 고름 다리
칡으로 묶은 그 위로
이불 대신 무지막지 퍼붓던 눈발,
눈은 썩지 않아서 다리를 살려주려나
수십 번 도려낸 뼈와 살의 날들
그렇게 사람도 아니 있던
칡 같은 아이
살다 보니 눈이 녹았어
---
*참새기름.

♧ 발의 말
-김순여
생일의 심장을 쏘았어요
여린 발을 쏘았어요 그날
위로받지 못한 나는 당신의 사라진
작고 어여쁜 발
안 보이지만 나는 이미 돌아온
당신의 사랑이어요
우린 이미 한 몸이죠
노랑 애기수선 반짝이는 발의 묘에서
나는 늘 새로 태어나죠
엄마도 오빠도 늘 촛불을 켜서 기다리죠
당신의 생일이니까요
나는 여리고 여린 당신의 발
어디에 있나요?
찾지 마세요
우린 벌써 새벽에서 어둠까지 하나예요
나는 당신이 처음 디딘 어여쁜 발
천둥치던 날 사라진
그래요 나는 다시 돌아온 당신의 사랑
절대 포기하지 않죠

♧ 그늘 없는 사람
그늘이 필요해
그늘 있는 데서만 말을 했지
그늘 있는 사람은 죽지 않았어
그늘 있는 사람은 절대 기죽지 않았어
그늘 없는 데서
연한 그늘도 없는 내가 이렇게 살았어
밤 오면 우릉우릉우릉
백설이 소금처럼 내려 쌓이고
산에 갔다 내려온 겨울
남자 없는 사람은 어디서든
날카로운 표적이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려야 했어
그래서 살아지고
저래서 살아지고
*허영선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자나온 자들이어서』 (마음의숲,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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