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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3)와 설경

by 김창집1 2023. 12. 21.

 

 

귀를 열어 길을 열다 이택경

 

 

누군가 내 몸에 활을 댄다

 

한낮의 소음에 숨죽여 도사리던 음모

고요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밤이면 현란하게 시작되는 연주회

 

휘어지고 틀어진 미로에 갇혀

공명되지 못한 소리가 울부짖는다

소리가 없는 소리

나 아닌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

 

가장 가느다란 현을 골라

끊임없이 활질을 하는 저 연주자는 누구인가

 

높낮이도 없이 그 저 한 음

바이칼 호수의 빙평선처럼

얼어붙은 시베리아를 달리는 침엽수림처럼

질리도록 꼿꼿한 음계

 

양손으로 귀를 막아본다

최고조에 이르는 활의 난무

하이 C# 톤으로 울부짖는 난장에서도

옆에 누운 당신은 고른 숨소리로 밤을 건넌다

 

쥐구멍 쑤신다 쥐구멍 쑤신다 하며

밤이면 귀이개를 찾던 어머니

귀를 열어 소리의 길을 내어 준 것이었을까

귀 어두워 꿈조차 먹먹한 지금

당신의 밤은 이제 안녕하신지

 

잠 밖으로 밀려난 나 아닌 나를 찾아

밤 깊도록 모로 누워 귀울음을 듣는다

 

 

 

 

춤바람 김용태

 

 

바다가 춤바람 났다

지난 밤 꼬임에 넘어간 파도가

물살 손에 이끌려

출렁이며 스텝을 밟았다

 

검푸른 무도장 가득 채운 춤꾼들

폭풍이 두드리는 장단에

서로를 끌어안고

격렬하게 놀아났다

 

바다 무도장 손님들이

밀물 썰물 쏠려 다닌다

 

서로를 깊고 푸르게 흔들어주는

바람, 춤바람

블루스, 탱고, 지르박

강약 조절하면서

마음을 흔들어 주는 거다

 

 

 

 

속리산 정봉기

 

 

물길 따라 거슬러 들면

인가와 멀어져

사람의 이야기는 바위로 남아

전설이 된다.

송이송이 불쑥불쑥

나름의 내력을 들려준다.

짧지 않은 세월에 깎여

이렁저렁 여기에 머물렀단다.

어딘들 멈춰 선 생이 있겠는가.

누군들 붙박이로 남겠는가.

바람에 실린 물이고 구름인 것을,

적송赤松의 바다가 출렁 운다.

 

 

 

 

환절기 위인환

 

 

계절이 자리바꿈하면

기온은 허언을 한다

서릿발 같은 거짓말에

냉해를 입은 새싹

허풍이 세력을 키우면

폭탄처럼 터지는 꽃망울

가 끓는다

끓는 죽 같은 변덕에

낯 뜨거워진 재난

붉은 꽃이 피는 오월

광장에 만발한 꽃에 가시가 성성하다

간절기 기침

찬바람이 느닷없이 불고

 

 

 

 

끊어진 철길 - 신경림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월간 우리12월호(통권 426)에서

                                        *사진 : 사라오름의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