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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6)

by 김창집1 2023. 12. 23.

 

 

몽유

 

 

조약돌을 닮은 소녀가 웃는다

빈 주머니 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불행해지려고 하면

슬며시 느슨해지는 목줄

 

바람도 아는 길로만 흐르는 낮달 아래

소녀의 흰목이 골똘히 웃는다

 

돌아오는 길만 아는 파도

씻긴 표정들을 주워가는 손목들

 

악의는 부끄러움이 없어

송곳처럼 빛난다

 

깨진 소녀는

눈부신 불신으로

깊이 자라고

 

남겨진 표정들이

빈 주머니에 숨는다

 

내일은

내일이 사라지면 좋겠다

 

가득 찬 소녀가

모르게 풍화된다

 

 

 

숨바꼭질

 

 

   수요일과 목요일 사이로 사라진 사내에게선 가죽 허리띠 냄새가 났지 사내의 늙은 사냥개가 컹컹 사내를 찾아 다녔어 사내가 사라지기 전 시녀는 잠든 사내의 손목을 잘라 달아났지 잘린 손목은 썩어가면서도 시녀에게 명령을 해댔어 뭉개져가는 손목을 숨긴 채 시녀는 잊힌 모서리만 찾아다녔지 들키지 않는 모서리는 시녀의 오랜 꿈이 되었어 냄새가 짙어질수록 추격은 가깝고 요일들은 서로의 틈을 흘겨보았지 손목이 백골이 되자 사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풍문이 돌았어 고독의 숲에서 사내가 목을 매달았다는 풍문도 돌았지 사내가 가여워진 시녀는 모서리에서 나와 숲으로 갔어 흐늘거리는 사내를 눕혀주고 백골의 손목을 돌려주었지 시녀는 사내의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어 컹컹 늙은 사냥개가 시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어

 

 

 

 

집으로

 

 

스스로 조이는 목이 가장 안전해

다정한 목줄 끌며

젖은 날개에 기대어

제가 쌓아올린 절벽으로

 

바지런히 홰치는 팔딱거림들

게우고 또 게우며

늙은 어부를 위해

아물 새 없이 찢기는 모가지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럴수록

까마득한 발밑 절벽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말랑거리던 시간 반죽

느리게 펼쳐지던 어린 날의 너른 오후

다사롭던 어미의 바랜 손바닥

결결이 나를 향하던 숨

 

언제부턴가 세상은

들통난 실수를 지켜보는 입꼬리

불멸의 늙은 어부가

던져주는 좁은 투망

 

까만 가마우지 한 마리

풀리지 않는 넥타이 끌며

밤과 함께 지워질 고백들 뚝뚝 흘리며

, 가장자리 둥근 모서리

바윗부리로

 

 

 

 

봄날, 마라도

 

 

기억의 숲에서

아슴아슴 돋아나는

당신의 형태소들은

나풀나풀 지친 기색도 없이

 

빙하기와 간빙기가 엄습하는 가슴 녘

당신이라는 알레르기가 뿌리내리는 시절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달려간

파장 무렵의 대폿집

왔냐,

숨 가르는 내 머리칼을

엉클고 자리를 털던 당신

 

맛 모를 막걸리 두어 잔 얻어 마시고 돌아와

서늘한 방바닥에 모로 누우면

온몸의 알레르기가 가렵고 따가웠던 밤

 

당신은 송악산호

나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

파도의 현울림만 시원하던 길

 

백년초 노랑 꽃잎 만발한 남쪽 섬

당신은 등대를, 원조 자장면을, 작은 교회를

나는 당신의 어깨를, 당신의 옷깃을, 손등의 점을

 

흑백 사진 같은 살래덕 선착장

때마침 불어오는 비바람

헤어져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어이 배를 타겠다는 뒷모습을 보며

애꿎은 꽃 모가지만 비틀고 말았지

 

 

 

 

고양이 버스

 

 

내가 아직 반죽덩어리였을 때

한 가지 무게의 웃음만 보았을 때

손가락 대신 꼬리가 돋았으면 했다

 

쉽게 엉덩이를 보이고

납작한 울음을

빈잠으로 대신했으면 했다

 

추워서 버스를 탔는데

행선지가 없음을

누군가 알 것 같아

더 작거나 더 크지 못한 나는

흐물거리다 쏟아져버리지 않도록

발끝을 세웠다

 

고양이 버스는 종점이 없어

잠들 수 없었는데

드러난 나는 더 이상

고양이 버스를 볼 수 없어

움츠러들었다

 

나는 내가 된 뒤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시선 120,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