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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3. 12. 25.

 

 

끊어진 철길 - 신경림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생각나는군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 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겠군

자유를 보여주려는 단군할아버지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이산가족 - 염창권

 

 

그리움은 세월을 당겨놓은 주름이었다

그 마음에 기대면 두메처럼 그늘 졌다

상봉의 탁자에 앉으니 몸에 뜨는 노을이다.

 

모두들 울음의 강 하나씩 끌고 와서 먼 기억의 손 붙들고 물살처럼 굽이친다.

 

마음의 평생을 쏟아낸 이박삼일,

꿈이었나.

 

상별의 손바닥이 유리창에 차게 닿자

그 사이로 실금 같은 선로가 끊어졌다

이랑진 손바닥의 길

또 건너지 못한다.

 

 

 

 

콩가루 집안의 어떤 통일을 기원함 김승희

 

 

콩가루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서

동서남북으로 훨훨 펄펄 날아가서

때로 콩가루는 콩가루를 미워하고

이별의 역사는 만남의 역사이고

전쟁의 역사는 평화의 역사인데

콩가루야 콩가루야 애절하게 부르다가 설혹 만난다 해도

 

콩가루와 콩가루가 만나서

원래의 온전한 하나의 콩이 되는 것은 불가능,

그 수술실의 실밥과 붕대와 피 주머니와 주사바늘을 어쩌고

그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의 금과 흉터 자국을 어쩌고

아무리 콩가루를 뭉쳐도

원래의 그 소담하고 동그란 콩의 원형으로

복원되기는 어려우나

 

콩가루야 콩가루야

우리는 이제 콩가루에서 시작하여

작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자

 

콩가루 인절미 떡이나 고소한 콩국수, 산나물 콩가루 무침,

콩가루 우유나 콩가루 쑥떡, 무시래기콩가루 국,

영화 같은 거대 담론은 말고

겸허하게 콩가루에서 시작하여

우리 서로에게 유익한 콩가루가 되자

콩가루 한 말이면 열 식구 보릿고개도 넘는다고 하니

하여

 

콩가루 집안은 이제 그런 꿈같은 콩가루 쑥떡 같은 잔치가 되자

 

 

 

 

4월은 판문점 뒤뜰에 와 - 이병일

 

 

죄 지을 일도 없이 나직한 평화를 위해 끝까지 가게 하소서

잠깐 흐름을 잇는 일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자유를 얻게 하소서

냉전이란 그 엄청난 압력이, 발뒤꿈치 들고

자작나무 잎을 눕히는 바람에 숨어 낮잠에 들게 하소서

반백년이 지나도 외출 중인 폐허의 아름다움이여

밤 때문에 달이 머문다고

낮 때문에 해가 머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낮이 밤을 만나러 가서 밤이 낮을 만나러 와서

폭력이 종언되었다고 믿게 하소서

 

저 길 위에 살아있는 것은 철망도 절망도 아니고

벽에 부딪쳐 다시 일어나는 무르팍의 노래였으니까

여름으로 가는 길이 무덥고 길더라도

길이 내는 우리들의 발자국을 응시하게 하소서

또한 사실을 사실대로 믿지 못하는 자의 눈을

흙의 광기로 씻어 등재 되지 않는 현실을 읽게 하소서

나무와 새가 말을 한다는 신화의 책갈피가 되게 하소서

여기까지 출렁출렁 들리는 저 말, 소리, 웃음, 평온이 있어

더 이상 전쟁과 분단이라는 말이 이 땅 위에 없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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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우리’ 12월호에 실린 이송희 씨의 평론 끊어진 철길 위의 독백이라는 글에 인용된 시들임을 밝힙니다.

 

 

                * 시 : 월간 우리12월호 통권 제426호에서

                * 사진 : 정전 70주년 특집 어머니의 고향, 개마고원(KB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