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포
집안으로 스미는
어슴푸레한 빛을 건들면
물고기자리, 꿈틀댄다
작은 배 한 척 현관문 불빛에 반짝인다
격랑에 쓸려 와 주저앉은
아버지
오늘도 허탕이다
자리다툼을 하다
한쪽 입이 찢어진 노인은
머리카락 뭉치를
한 손에 쥐고 있다
쥐어뜯긴 생긴 서너 개의 땜빵을 모른 체한다
연고를 발라주지 않는다
모비딕과의 사투 끝에
생긴 상처라고 믿기로 한다
그의 앙상한 팔뚝에
없는 근육을 보태어 말하지 않으면
낚싯줄을 당겨
별자리를 바꾸어놓지 않으면
다시는 그가
출항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피 칠갑한 등허리가
바다를 물들이며 가라앉는 밤
고래자리, 뼈가 하얗다
♧ 자유시간
모르는 아이에게 초코바 한 입
구걸했다 퇴짜를 맞던 하굣길
길바닥에 버려진 초코바 봉지를
두리번거리다가 들춰 본 적 있다
개미 몇 마리 떼어내어
볕살에 녹아내리는 그것을
혀끝으로 핥아 보았다
쉬이 먹지 못하는 걸 먹으면
아, 어지럽다 아득하다
없던 힘이 솟는 것만 같다
그 달콤함에 물들어
마트에 있는 초코바 몇 개를
훔친 적 있다
허름한 건물 뒤편에 쪼그려 앉아
콧물 범벅인 그것을 해치웠지만
아무 맛도, 아무 힘도 나지 않았다
목이 메어서 가슴만 두드렸다
나는 다 커서도 버려진
과자 봉지 따위를
손으로 들춰 보곤 한다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나서
방에서 서러워하다가
녹은 초코바처럼 눌어붙었다가
흘러내리는 이불을 턱 끝까지 당긴다
♧ 아파트
뉴스에서 집값 얘기가 나오면
무릎은 점점 칠이 벗겨진다 그래도 꿈은 이루어진다고
고집을 피운다 엄마는
아파트를 드나드는 게 일이다
사람들이 밖을 나가는 시각에 들어와
계단을 오르며 문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숨죽여 듣는다
집을 제외하고 1층부터 옥상까지 이어진
계단과 복도는 거의 엄마의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것은 아니다
무릎에 물이 찬 그녀는
첨벙거렸고 층계를 오를수록 말수가 줄었다
넘어서지 못한다는 거 그거,
하마터면 살 뻔했지만
거의 살 뻔했지만
아파트 외벽 페인트가 벗겨져도
엄마는 우긴다
경비실 옆 창고에 땟국물 흐르는 마포 걸레로
계단과 복도를 닦으면서
얼룩진 꿈으로 문 앞을 서성이면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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