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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5)

by 김창집1 2024. 5. 1.

 

 

바벨의 섬

 

 

고향이 다른 말은 낯가림도 심하다던가

뭍에서 온 청년들과 풀을 베던 섬 사내가

봄 지나 여름으로 가던 숲길에서 마주쳤다

 

-혼져옵서, 예꺼정 오젠 촘말로 폭삭 속았수다

-무시기? 속긴 뭘 속아, 그딴 말에 내래 쉬 속간? 재 별스런 말튀 쓰는 니는 뉘기야? 어드래 뽕오라지서 실실 내려옴둥? 날래 답해 보라우, 뉘기랑 있다 왔슴둥? 순순히 알쾌주먼 안 삽하게 놔 주갔어

-메께라! 무사 말이우꽈? 경 또리지 맙서*

 

방점을 찍지 못해 허공으로 날린 말들

귀 울린 바람처럼 소리마저 스러진 후

마을은 불길과 함께 적막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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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방언과 평안도 방언.

- 어서 오세요. 예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 뭐라고? 속긴 뭘 속아, 그런 말에 내가 쉽게 속을 줄 알아? 이상하게 말하는 년 누구야? 어째서 산봉우리에서 슬슬 내려오는가?

어서 대답해. 누구랑 있다 왔어? 순순히 알려주면 고이 보내줄게.

- 아이고!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때리지 마세요.

 

 

 

 

그리하여 그들은 산으로 갔다

 

 

바람을 탄 들불이

섬을 온통 휩쓸었다

 

낮에는 뭍을 향해 해풍이 휘몰아쳤고

밤에는 신풍이 불어 불길을 더 키웠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초집은 태위지고

매캐한 목소리엔 그을음이 묻어났다

마을엔 불티를 피할 언덕조차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다시 세운 환해장성

 

집을 잃은 삼촌들은 다시금 길을 잃고

설문대할망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다

 

몇 차례 해를 바꿔 산신당에 봄이 와도

산에 든 사람들은 그대로 산이 됐는지

그 봄날 꽃불만 같은 진달래만 붉었다

 

 

 

 

그해 겨울의 눈

 

 

눈 덮인 한라산은

소복 입은 여인 같다

 

노루도 발이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길을

허기로 감발을 한 채 숨가삐 뛰던 이들

 

허공 찢는 총성 앞에

메아리도 비명을 지르고

 

언 기습을 후려치던 혹한의 바람 소리

점점이 붉은 피꽃이 눈꽃 속에 피어났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먼 봄을 되새김하듯 겨울은 다시 와서

곱다시 뼛가루 같은 하안 눈이 내린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