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촉 – 이산
휠체어, 앞에 섰다
세상 밖으로 고정된 어머니 눈길은
오늘도 무심하다
얼굴을 확연히 내밀며 이름을 일러 줘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불러도 또 불러 봐도
청국장 밥상의 도란거리던 이야기가
최종본이라 생각하는지
희미한 미소는 항상 저쪽에 있다
텅 빈 허공의 무수한 이들과
나직이 선문답을 이어가다가
문득, 또렷한 입술이 어두워졌다
- 쟤들이 자꾸 가자고 재촉하네
느리게 익어 가는 하늘 저편으로
까마귀 떼 줄지어 날아간다
가~ 가~ 가~
♧ 맛집 탐방기 - 윤순호
모녀가 한목소리로 맛집 탐방을 제안했다
서울 토박이의 기억을 더듬기로 하고
세 사람이 뜻을 합했다
을씨년스런 날은 따끈한 국물이 제격
코로나 역병은 상관없다는 듯
대기 순번은 꼬리가 길고 거리두기는 흉내만 냈다
입술이 종잇장 같은 밥공기며
주인 할머니와 나이를 함께한 냄비들
찌그러진 세월은 차라리 정겨웠다
비좁은 의자나 빠듯한 식탁은
체구가 작았던 그 시절을 일깨우지만
몸집들은 투정 하나 없이 불편을 삼켰다
금고를 곳간 열쇠처럼 쥐고 있는 노파는
빈 접시를 찾아 푸짐한 인심을 날랐다
손끝 야무진 겉절이와 갓 지은 밥은 무한 리필
따뜻한 어머니의 정을 알아챈 젊은이들
밀린 주문이 홀을 가득 메웠다
‘닭백숙백반집’ 노파는
관절이 절룩거리고 있었다
♧ 겨울 버들계곡 – 방순미
노송 빼곡한 계곡
떡눈으로 우거진
숲 한 채
동박새 드나들던
나무 아래
오도카니 앉아
한겨울 지내도
아무 상관없는
지상에 묶인
몸은 제쳐 두고
켜켜이 쌓인 마음만
들여놓고 물러서야겠다
♧ 물의 과외공부 - 박용운
어둠에 참긴 청계호수
저녁 한 권을 다 읽은
촉촉한 물의 알갱이들이 호수를 빠져나온다
소리 없이 주변을 다 암기한 물안개
호수를 딛고 일어나 허공 한 귀퉁이를 펼친다
주변을 감싸는 자욱한 물의 필체들
무지개로 날고 싶은 꿈
뼈가 없어 흐느적거리며
산자락을 휘감고 계곡을 오르지만
하루도 살지 못하는 헐렁한 물방울들
수 없이 날갯짓을 하여도
하늘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가만히 걸어오는 아침
어둠을 살펴 조심조심 걷지만
햇살에 녹아내리는 물의 손가락
풀잎의 겉장이 다 젖었다
호수를 빠져나와 날마다 주변을 복습하는
물의 과외공부
또 새벽을 기다린다
♧ 폭설 - 윤순호
적송이라고
옥토는 아니어도 배산임수였네
양지에 바람길 순해
무병장수가 꿈은 아니었을 듯
몸뚱어리나 불리고
가지 뻗는 일 말고는
고통을 몰랐던 게 화근이었을까
잎이 무성하기로
제 몸에 쌓인 눈 하나 털어 내지 못하고
밑동이 우두둑 꺾이고 말았네
장수가 에서 멎고 절개도 여기까지라니
아름드리가 등산길을 막고 누워 버렸네
간밤
보기 드문 폭설이었네
*월간 『우리詩』 4월호(통권43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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