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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8)와 남방바람꽃

by 김창집1 2024. 5. 3.

 

 

재촉 이산

 

 

휠체어, 앞에 섰다

세상 밖으로 고정된 어머니 눈길은

오늘도 무심하다

 

얼굴을 확연히 내밀며 이름을 일러 줘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불러도 또 불러 봐도

청국장 밥상의 도란거리던 이야기가

최종본이라 생각하는지

희미한 미소는 항상 저쪽에 있다

 

텅 빈 허공의 무수한 이들과

나직이 선문답을 이어가다가

문득, 또렷한 입술이 어두워졌다

- 쟤들이 자꾸 가자고 재촉하네

 

느리게 익어 가는 하늘 저편으로

까마귀 떼 줄지어 날아간다

 

 

 

 

맛집 탐방기 - 윤순호

 

 

모녀가 한목소리로 맛집 탐방을 제안했다

서울 토박이의 기억을 더듬기로 하고

세 사람이 뜻을 합했다

을씨년스런 날은 따끈한 국물이 제격

코로나 역병은 상관없다는 듯

대기 순번은 꼬리가 길고 거리두기는 흉내만 냈다

입술이 종잇장 같은 밥공기며

주인 할머니와 나이를 함께한 냄비들

찌그러진 세월은 차라리 정겨웠다

비좁은 의자나 빠듯한 식탁은

체구가 작았던 그 시절을 일깨우지만

몸집들은 투정 하나 없이 불편을 삼켰다

금고를 곳간 열쇠처럼 쥐고 있는 노파는

빈 접시를 찾아 푸짐한 인심을 날랐다

손끝 야무진 겉절이와 갓 지은 밥은 무한 리필

따뜻한 어머니의 정을 알아챈 젊은이들

밀린 주문이 홀을 가득 메웠다

닭백숙백반집노파는

관절이 절룩거리고 있었다

 

 

 

 

겨울 버들계곡 방순미

 

 

노송 빼곡한 계곡

떡눈으로 우거진

숲 한 채

 

동박새 드나들던

나무 아래

오도카니 앉아

 

한겨울 지내도

아무 상관없는

 

지상에 묶인

몸은 제쳐 두고

 

켜켜이 쌓인 마음만

들여놓고 물러서야겠다

 

 

 

 

물의 과외공부 - 박용운

 

 

어둠에 참긴 청계호수

저녁 한 권을 다 읽은

촉촉한 물의 알갱이들이 호수를 빠져나온다

 

소리 없이 주변을 다 암기한 물안개

호수를 딛고 일어나 허공 한 귀퉁이를 펼친다

 

주변을 감싸는 자욱한 물의 필체들

 

무지개로 날고 싶은 꿈

뼈가 없어 흐느적거리며

산자락을 휘감고 계곡을 오르지만

하루도 살지 못하는 헐렁한 물방울들

수 없이 날갯짓을 하여도

하늘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가만히 걸어오는 아침

어둠을 살펴 조심조심 걷지만

햇살에 녹아내리는 물의 손가락

풀잎의 겉장이 다 젖었다

 

호수를 빠져나와 날마다 주변을 복습하는

물의 과외공부

또 새벽을 기다린다

 

 

 

 

폭설 - 윤순호

 

 

적송이라고

옥토는 아니어도 배산임수였네

양지에 바람길 순해

무병장수가 꿈은 아니었을 듯

몸뚱어리나 불리고

가지 뻗는 일 말고는

고통을 몰랐던 게 화근이었을까

잎이 무성하기로

제 몸에 쌓인 눈 하나 털어 내지 못하고

밑동이 우두둑 꺾이고 말았네

장수가 에서 멎고 절개도 여기까지라니

아름드리가 등산길을 막고 누워 버렸네

간밤

보기 드문 폭설이었네

 

 

                          *월간 우리4월호(통권43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