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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6)

by 김창집1 2024. 5. 4.

 

 

빌레못굴* 연대기

 

 

대지도 물김 뿜는 화산도의 숨찬 기울

녹이 슨 쇠살문이 불침번을 서고 있다

선사의 푸른 달빛이 결빙된 연못가에

 

한 굽이 돌아들면 기습 시린 바람 소리

역사의 앞마당에 들지 못한 기억들이

억새풀 줄기를 잡고 혼불처럼 일렁인다

 

2.

꺽짓손 설문대할망 불구덩이 잠재우면

한라산 자락 따라 실아 뛰던 푸른 맥박

태초의 어둠을 쫓는 아침 해가 솟았다

 

물과 불 그 경계를 넘나들던 맨발 자국

주수퓨도 눈보라도 온몸으로 그러안은

수천 년 묵언의 시간 화석으로 기록되고

 

곰 노루 울음마저 굳어버린 지층 아래

탄화된 씨족사氏族史가 돌무지로 깨어날 때

구석기 돌도끼 몇 점 해와 겨누웠다

 

3.

수렵시대 잔해 같은 살육의 불씨 한 점

옛 주인 가고 없는 동굴 속에 되살아나

바다도 하늘과 함께 핏빛으로 물들였다

 

초가집은 태워지고 마을은 또 지워졌다

낮과 밤 두지 않던 생사의 가름 앞에

칡매끼 얽히고설켜 짧기만 했던 목숨줄

 

동굴 속 미로에도 깨지 못할 벽은 있어

미쳐 뛰는 구구총 소리 산 쪽으로 돌려놓고

핏발선 동공에 맺힌 붉은 눈물 쏟았다

 

아비가 아들을 묻고 할망이 산담을 쌓는

선대先代의 주름살이 산과 들을 뒤덮어도

탐라의 제사상에는 지방紙榜조차 쓰지 않고

 

천둥이 칠 때마다 몸을 움찔 떠는 동굴

빌레못에 갇혀 우는 시간의 샅 밑으로

용암은 출구가 막혀 속으로만 끊었다

 

4.

청맹과니 유물 캐듯 헛손질에 부은 목젖

봉인된 메아리가 실어증을 벗어날 쯤

까마귀 목쉰 울음이 물소리로 잠긴다

 

식민지 흉터 위에 막소금을 뿌리던 땅

야만의 어둠 걷는 볕은 아직 희미해도

다시금 새봄을 여는 저 야성의 숨비소리

 

빗돌 하나 겨우 세운 굴은 차츰 무너져도

수평선 휘적시는 까치놀의 문신 같은

동굴 속 연대기 한 장 축문 짓듯 쓰고 싶다

 

 

 

 

성산봉 일출

 

 

오늘도

폐허 위로

봉홧불이 오른다

 

머리 잘린 산 그림자

곤두박인

핏빛 바다

 

테우리 목쉰오름이

터진목*에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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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성산지역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된 43유적지.

 

 

 

 

터진목에서

 

 

현무암 및 침묵만이 물과 뭍 덮고 있는

광치기 해변에서 소지燒紙 한 장 사른다

갈매기 붉은 눈빛에 옷깃 다시 여미며

 

하루도 쉬지 않고 곡소리를 내는 바다

고추뿔 세운 파도 벼락 치듯 달려들고

바람은 바위를 깨워 피리를 불게 한다

 

얼마만큼 사무쳐야 이름에도 피가 밸까

붓고 아픈 목이 아닌 터진 목, 터진목이라니

내 목도 피가 터진 양 울대가 뜨거워지고

 

유채꽃 감자 꽃이 갈마들며 피던 마을

삼월의 꽃샘인지 사월의 잎샘인지

그해 봄 불의 태풍은 눈물마저 태웠다

 

제 가슴 밑바닥을 저미는 기억 앞에

한낮에도 일출봉은 그늘만 드리운다

언제쯤 말문을 열까, 실어증에 빠진 하늘

 

시대의 염습殮襲 같은 갈파래 융단 위로

수장된 시간들을 보말 줍듯 건져내면

수평 끝 남극노인성 피명울을 씻고 있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