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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6)

by 김창집1 2024. 5. 17.

 

 

박성내*의 밤 - 오광석

 

 

구름에 가린 달빛 근근하게 비추는 밤

박성내 옆길을 지날 때 소리가 들렸어요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스윽스윽 끌며 따라오는 소리

발걸음 소리 크게 기자촌으로 급히 걸어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 이상한 밤

흐윽 소리에 뒤돌아보자

길옆 어두운 자리에 선 한 남자

 

아내도 아이도 잃고 홀로 배회하는 날들

구멍 뚫린 가슴에서 바람 소리 들려온 날들

돌아가고픈 조천리 집은 사라지고 없는지

돌고 돌아도 박성내 이 자리

헤매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변해가는 자리

거멓게 사라져가는 날들

누군가 돌아보면 나 여기 있소 부르는데

돌아보는 이마다 부르르 떨며 도망치네

붙잡고 넋두리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박성대

 

풀어헤쳐진 머리 핏기 스민 갈증이

무서워 오돌오돌 떠는데

고개 돌려 박성내를 바라보다 스윽 사라졌어요

그만 돌아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바로 오른쪽 귀 뒤 차가운 한기

소스라치며 동그랗게 눈을 떠보니

박성내를 지나는 500번 버스 뒷자리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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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산지천 상류. 제주43 ‘지수사건으로 100여 명이 학살된 학살터.

 

 


 

1* - 이정은

 

 

아무도

나비의 젖멍울을 묻지 않으므로

 

당신에게 앉을 것이다 나비가

선택하여

 

나비의 독을 드시라

연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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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세계비밀

 

 


 

그냥 살자 - 홍미순

 

 

너를 볼 수가 없었다

 

삼나무 숲

숲속은 우울했고

보이지 않는 파도 소리 부서진다

거대한 나무들이 빛의 행로를 차단했지

그림자는 늘 나를 감싸고돌았어

가지에 걸려 함부로 내리지 못한 창백한

얼굴이 돌아서던 길 어둠은 찾아왔지

하나둘 베어지고 쓰러지는

민둥산

숲이 사라지고 너를 볼 수 있었지

오랫동안 기다린 너는

바다를 향해 돌아누워 있더군

그런데, 말이야

벌거숭이로 너를 보게 되었단 말이지

돌아 보지마

그냥, 나는 이걸로 족해

봄이 되면 초록 옷을 입고 너를 볼 거야

돌아 보지마

무성해지는 옛 생각

힘들었어

낙엽 지듯 내 모습은 변해갔지

반세기를 살아냈으니

용기는 잡초처럼 자라나더군

잠깐 만나자

시간이 쌓이면 숲이 되지

부서지는 파도 소리 보여

그냥 살자

 

 


 

가무코지* - 황문희

 

 

파도는

거대한 빗자루처럼

해안선을 쓸어요.

구석구석 왔다 갔다 수천, 수억 년을

부지런히 해도

끝나지 않을 저 빗자루질

 

등 푸른 한라산이

아가미에서 애드벌룬 하나를 뱉어냅니다

발밑으로 고무장화도 벗고 양말도 벗어 던져

디딜 틈 없는 해안

모래알인 것마냥 흩어진 스티로폼 조각들

바람을 잔뜩 넣어 부풀어 오른 부표들

살아 있지 못한 것들은

더 이상 헤엄치지 않습니다

 

파도의 비질에 밀려오다가

저희들끼리 또 달라붙어

몽돌 아래 뿌리내리며 증식하네요

바다는 과식을 했는지

자꾸만 게워냅니다

역한 냄새는 꼭꼭 숨겨주세요

어차피 돌구멍 사이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으니

환한 대낮에 오지 말고 밤에 오세요

 

포말이 등 푸른 비닐과 함께 부서지는 이곳

참으로 휘황찬란한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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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코지 : 한라산을 등지고 가문동 해안을 따라 걸으면 만나는 포구.

 

 

                       *계간 제주작가봄호(통권 8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