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내*의 밤 - 오광석
구름에 가린 달빛 근근하게 비추는 밤
박성내 옆길을 지날 때 소리가 들렸어요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스윽스윽 끌며 따라오는 소리
발걸음 소리 크게 기자촌으로 급히 걸어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 이상한 밤
흐윽 소리에 뒤돌아보자
길옆 어두운 자리에 선 한 남자
아내도 아이도 잃고 홀로 배회하는 날들
구멍 뚫린 가슴에서 바람 소리 들려온 날들
돌아가고픈 조천리 집은 사라지고 없는지
돌고 돌아도 박성내 이 자리
헤매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변해가는 자리
거멓게 사라져가는 날들
누군가 돌아보면 나 여기 있소 부르는데
돌아보는 이마다 부르르 떨며 도망치네
붙잡고 넋두리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박성대
풀어헤쳐진 머리 핏기 스민 갈증이
무서워 오돌오돌 떠는데
고개 돌려 박성내를 바라보다 스윽 사라졌어요
그만 돌아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바로 오른쪽 귀 뒤 차가운 한기
소스라치며 동그랗게 눈을 떠보니
박성내를 지나는 500번 버스 뒷자리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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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산지천 상류. 제주4․3 ‘지수사건’으로 100여 명이 학살된 학살터.
♧ 1* - 이정은
아무도
나비의 젖멍울을 묻지 않으므로
당신에게 앉을 것이다 나비가
선택하여
나비의 독을 드시라
연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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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세계』 비밀
♧ 그냥 살자 - 홍미순
너를 볼 수가 없었다
삼나무 숲
숲속은 우울했고
보이지 않는 파도 소리 부서진다
거대한 나무들이 빛의 행로를 차단했지
그림자는 늘 나를 감싸고돌았어
가지에 걸려 함부로 내리지 못한 창백한
얼굴이 돌아서던 길 어둠은 찾아왔지
하나둘 베어지고 쓰러지는
민둥산
숲이 사라지고 너를 볼 수 있었지
오랫동안 기다린 너는
바다를 향해 돌아누워 있더군
그런데, 말이야
벌거숭이로 너를 보게 되었단 말이지
돌아 보지마
그냥, 나는 이걸로 족해
봄이 되면 초록 옷을 입고 너를 볼 거야
돌아 보지마
무성해지는 옛 생각
힘들었어
낙엽 지듯 내 모습은 변해갔지
반세기를 살아냈으니
용기는 잡초처럼 자라나더군
잠깐 만나자
시간이 쌓이면 숲이 되지
부서지는 파도 소리 보여
그냥 살자
♧ 가무코지* - 황문희
파도는
거대한 빗자루처럼
해안선을 쓸어요.
구석구석 왔다 갔다 수천, 수억 년을
부지런히 해도
끝나지 않을 저 빗자루질
등 푸른 한라산이
아가미에서 애드벌룬 하나를 뱉어냅니다
발밑으로 고무장화도 벗고 양말도 벗어 던져
디딜 틈 없는 해안
모래알인 것마냥 흩어진 스티로폼 조각들
바람을 잔뜩 넣어 부풀어 오른 부표들
살아 있지 못한 것들은
더 이상 헤엄치지 않습니다
파도의 비질에 밀려오다가
저희들끼리 또 달라붙어
몽돌 아래 뿌리내리며 증식하네요
바다는 과식을 했는지
자꾸만 게워냅니다
역한 냄새는 꼭꼭 숨겨주세요
어차피 돌구멍 사이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으니
환한 대낮에 오지 말고 밤에 오세요
포말이 등 푸른 비닐과 함께 부서지는 이곳
참으로 휘황찬란한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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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코지 : 한라산을 등지고 가문동 해안을 따라 걸으면 만나는 포구.
*계간 『제주작가』 봄호(통권 8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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