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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6)

by 김창집1 2024. 5. 19.

 

 

차나 마시게

   -다소재 찻집에서 경주영화를 보고

 

 

예스러운 경주 풍경 속에

허름한 변두리 찻집

색바랜 창호지 문 너머

고즈넉한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7년 전 벽에 붙어있던 춘화를 떠올리며

차를 마신다

 

창문만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능선

경주는 능선 따라 하루를 시작한다

삶과 죽음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오늘은 40대의 황차를 마신다

맑은 하늘처럼 깨끗한

부드러운 하늘을 마신다

욕망을 걸러낸

한 모금의 차로

아름다운 능선과 같은 삶을

엿본다

 

근심과 불안을 걸러내며

편안함을 마신다

목마르지 않아도

지금

여기 와서

차나 한잔 마시게

 

 


 

수레바퀴

   -극단 파노가리의 수레바퀴연극을 보고

 

 

소녀는 웃고 있어요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돈이 없어서 절망하고 있어요

지나가던 노신사 딱한 사연을 듣고 조건 없이 돈을 줍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다 노신사를 찾아갑니다

힘든 택배 일을 하지 않아도

장사를 하지 않아도

농사를 짓지 않아도 돈이 넘쳐납니다

화장지는 없어도

돈은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점점 게으르고 타락의 길로 달려갑니다

가치를 잃은 돈은 낙엽 되어 길가에 뒹굽니다

돈만 있으면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회는 마비되고

돈으로도

총으로도

혼란스러운 사회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절규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릴 뿐

부풀어 오르던 애드벌룬 곤두박질칠 때

여기저기 불꽃이 일어납니다

욕망의 돈을 태워버립니다

다시 돌아올 봄을 위하여

논두렁을 태우듯 활활 타오릅니다

 

 


 

단팥 인생

    -다소재 찻집에서 영화 을 보고

 

 

벚꽃이 눈부시던 날

슬픈 너의 눈을 보았을 때

나의 발걸음은 너의 창 앞에 서 있었다

균일한 제복을 입은

영혼 없는 앙금을 넣은 도라야끼 같은

센타로의 삶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도쿠에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벚꽃과 같은 화사한 햇빛과

바람 같은 자유로운 나날을

선물해주었다

팥이 밭에서 농부의 손을 거쳐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바람과 비와 눈과 햇빛이

수많은 수고로움과 정성으로 당도했으니

한 알 한 알 팥을 골라내고

물을 담그고

끓이고

천천히 비린내를 흘려보내며

다시 끓이고

정성으로 뜸을 들여야 한다

팥과 물엿이 처음 만나는 순간

서로를 알아가며 스며드는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만남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을다하여 정성으로 팥을 대할 때

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팥의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맛있는 단팥 앙금을 얻을 수 있다

오랜 기다림으로 마음을 다할 때

달빛의 소리도

새의 마음도

들을 수 있나니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