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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4. 5. 20.

 

 

그 보리밭 - 송준규

 

 

  넓디넓은 구만리 청보리밭 출렁출렁 초록 파도 타고 풍력발전기는 유년의 흑백 영상 돌린다 보리등겨에 소다, 사카린 넣고 찐 새카만 보리개떡으로 태산같이 높고 험한 보릿고개 넘기고 보리밭 골 휘저으며 메추리알 줍고, 보리깜부기 구워 먹어 숯 검댕이 된 채 보리피리 불며 소 먹이러 가던 곳 멧비둘기 울어 대던 뒷동산엔 하안 찔레꽃 지천으로 피었었지 잘 익은 황금보리 베어 마당에 펼쳐 놓고 마주 서서 내리치는 리듬 맞춘 도리깨가 허공에 춤을 추는 타작마당 컬컬한 목을 타고 봇물처럼 시원하게 넘어가는 농주 한 사발에 낡은 울 아부지 보릿짚 모자에 웃음꽃 피고, 울 어메 삼베적삼 속 축 늘어진 젖가슴 덜렁이며 홍두깨로 칼국수 밀어 마당 한켠 가마솥에 보리 짚불로 삶아 내고, 잿불에 국수 꼬랑지 부풀부풀 꿈을 구웠었다 꽁보리밥 대소쿠리에 담아 우물 속에 대롱대롱 달아 뒀다가 찬물 말아 풋고추 된장 쿡 찍어 배 불리고 시도 때도 없이 뿡뿡대던 보리 방귀는 사랑의 멜로디라 했다 길어 올린 두레박 등물 뒤집어쓰며 더위와 한 판 승부 벌이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보리밭, 얼큰한 된장 끓여 상추 열무 뜯어 넣고 까만 꽁보리밥 탱글탱글한 추억을 쓱쓱 비비고 싶다. 차갑던 그 우물물 길어 아련한 그리움을 말고 싶다.

 

 


 

사랑이 되어 오라 - 신호철

 

 

사랑으로 오는 것들이여

사랑은 볼 수 없으므로 없는 것이 아니어라

사랑으로 오는 소리들이여

사랑은 들을 수 없어도 살아나는 소리여라

마른 풀꽃의 노래며

바람에 부대껴 오는 언덕의 얼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 되어 오라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사랑이 되어 안기라

사랑으로 안기는 것들이여

사랑은 채워짐이 아니라

한없는 비움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사랑은 하나를 잃고 또 하나를 잃는 것이어라

사랑으로 오는 것들이여

사랑은 홀로 제 살을 내어 주고 제 살을 먹이고

마침내 나는 없어지는 것이어서

가벼워지는 구름처럼 사라지는 것이어라

 

 


 

서 있다는 것 - 우정연

 

 

내 키와 비슷한 등 굽은 고무나무 화분이

찻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다

 

우두커니 서서 무심하게 스쳐 가는 눈빛을 향해

온몸 파르르 떨며 갈 길을 물어보지만

텅 빈 골방처럼 메아리는 없다

 

어딘가를 바라보며 서 있다는 것은

상행선 기차를 기다리며 홀로 서 있는 어스름처럼

갈 곳 몰라 두려움에 떠는 저녁처럼

노포동 터미널 대합실 플라스틱 슬리퍼의 혼돈 속이다

 

홀로 서 있다는 것은

튀어 오르고 싶은 날개의 가려움을 버티는 일이다

섬진강 은어 때가 바다 그리워 팔딱거리듯

그리움을 견디며 출렁거리는 일이다

 

 


 

뻐꾸기의 탁란 - 이기헌

 

 

삶의 방법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탁란을 택하기로 했다

혹자는 나를 몹쓸 족속이라고 하고

더러는 야비하다고 비난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무리 내게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나는 뻐꾸기로 살면 그만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탁란은 단지 삶의 한 방식일 뿐,

이 세상 모든 새들아

너희들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살아있는 피조물 가운데

탁란을 하지 않는 존재가 있으랴

성자도 단연코 말하지 않았는가

너희들 중에 단 하나라도

진실로 마음이 깨끗한 자 있으면

그땐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으리

 

 

                 * 월간 우리4월호(통권43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