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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by 김창집1 2024. 5. 27.

 

 

꽃잠 - 강우현

 

 

배나무 그늘이었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섰지만 떠나지 못했다

그늘이 전혀 다른 얼굴을 부릴 때도

한 발짝 움직일 수 없어 서성거렸다

끝자락이 당부인 양 밀어내도

짙은 그늘이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달라진 게 없다 했고

하안 배꽃이 피면 그늘의 볼도 붉게 부풀기 시작했다

살다가 벽을 만나면 돌아가고 싶은 곳

홀로 기른 열매를 바라보며 배꽃보다 환하던 얼굴

배나무가 그늘을 꿰맬 때 꽃잠 속으로 갔다

열매가 여물어 하나씩 떠나고 그늘 더 짙어진 배밭

계절은 에누리 없이 흘러가고

빈 가슴으로 별똥별이 지나가던 날

아버지는 사선을 따라 배꽃이 되었다

슬픔도 기쁨도 차곡차곡 접어놓은 배 밭에는

호탕한 웃음소리 들리고

바람이 한 번씩 다녀가는 날

내 눈물의 관절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린다

봄에는 꽃이 핀다

누구나 깊이 묻어 둔 그늘이 있어

 

 


 

버려진 풍경 속으로 김미외

 

 

  이끼 그늘 축축한 숲길, 썩은 등치 드러내고 누워 물컹한 숨을 쉬는 나무를 봅니다. 하늘만 보고 뻗었을 가지가 삼킨 슬픔 주위에 마른 잎이 위로를 건네듯 덮여 있습니다. 오랜 버릇처럼 나무에 걸터앉아 나뭇잎을 집자 후다닥 송장벌레들이 흩어집니다. 내 몸 어딘가에서 썩은 냄새가 풍기나 봅니다. 다시 슬금슬금 송장벌레들이 몰려듭니다. 어둠에 무너져 썩어 가는 생각을 깊이 감추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요. 뼈와 살을 해체해 둥글게 말아 구덩이에 밀어 넣는 저 청소부에게 허물어져 가는 이 한 몸 바치고 싶습니다. 지상에 머물던 흔적이 사라지는 동안 누가 나를 위해 좁쌀 한 줌 같은 울음을 쏟아 놓을까요. 혹여 서러운 곡소리가 계곡과 계곡을 타고 숲을 울릴 때면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고 새로운 눈망울로 수런거리겠지요. 끌린 듯 멈춰 버린 이곳에서 나락으로 패인 구덩이에 숨골의 마지막 숨을 묻고 일어서는 내가 보입니다. 송장벌레의 바쁜 몸짓으로 들썩이는 나뭇잎을 봅니다.

 

 


 

통영에 가면 김성중

 

 

 동피랑 벽화마을에 올라서 깔끄막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며 사람살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일이다

 동포루에 올라서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선인들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배울 일이다

 강구안 문화마당 조선 수군의 전함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전투를 벌이거나 여객선을 타고 부산이나 여수로 가볼 일이다

 동피랑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와 중앙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해산물을 구경할 일이다

 해산물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마시고 통영의 냄새를 맘껏 마실 일이다

 통제영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세병관에 올라갈 일이다

 내아, 주전소, 12공방, 느티나무

 통영문화원을 지나서 서문고개에 있는 박경리 생가를 찾을 일이다

 충렬사 이순신 장군 구국의 선봉

 김 약국의 딸들 작품의 무대

 서피랑 서포루를 바라보다가

 서호시장에 들러서 호미 한 자루 낫 한 자루를 살 일이다

 통영굴을 한 자루는 사서 올 일이다.

 

 


 

푸른 불꽃 - 김혜천

 

 

결빙의 시간을 견디고

애써 피워 올린 동백이 통째로 지는 것을 보는 일은

 

일생을 통해 쌓아 올린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몸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는 일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까지 내려가는 비애

 

그러나, 밑바닥까지 다 소진된 것일까

 

날숨 속에는 무겁고 한 차원 높은 열망의 광채가 섞여 있다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는

귀신들도 잠시 침묵한다 했다

 

문득 대지로부터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돌 부스러기 하나하나를 들어 올린다

 

하얗게 재가 될 때까지 타오를

산정山頂을 향한 푸른 불꽃

 

 

                      *월간 우리5월호(통권43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