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만든다* - 이화인
제비가 집을 짓는데
천오백 번 이상 흙을 물어다 짓고
매미는 일주일을 살려고
어둡고 습한 곳에서 칠 년을 견뎌 낸다
아기가 삼천 번 이상
엉덩방아 찧고서야 일어설 수 있고
피겨 선수는 사천 번 나둥그러지고
제 몸을 꽃으로 피운다
소금 한줌 얻으려면
바닷물 아흔아홉 바가지를 햇볕에 다려 말리고
쌀 한 톨을 얻기 위하여
농부는 여든여덟 번 손길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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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에서 인용
♧ 슬픈 자화상 – 임영희
연식이 오래된 나는
건망증이라는 탈을 쓰고 살지
이끼 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지
느슨하게 풀린 나사가
낡고 녹슬어
수시로 간헐적으로
작동이 멈추거나 삐걱거리지
남은 찬은 아깝다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곰팡이꽃 활짝 핀 후에야
자책하며 버리게 되지
렌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도
낡은 깜박이는
머릿속 망가진 회로를 타고 와
정신 줄을 놓기 일쑤지
다른 세계에 푹 빠져 있다가
탄내가 풀풀
콧구멍으로 진입해아만
제정신이 번쩍 들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무료해서 소일거리를 만들지
오늘도 새카맣게 눌어붙은
냄비를 닦는다고
끙끙 안간힘을 쓰고 있지
♧ 봄 – 정성수
마른나무에 귀를 갖다 대면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는지
모터 돌리는 소리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나뭇가지 끝 실핏줄 구석구석까지
보일러가
뜨거운 물을 보내면
봄은
온몸이 근질거린다며
참새 혀 같은 잎들을 밀어낸다
봄의 간절한 몸부림이 비로소 봄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 고흐를 위하여 - 남대희
-탕기영감*
사람을 그리고 나면
또 다시 사람이 그립다
귀를 잘라내고 난 후
눈은 귀 쪽으로 옮겨 와
눈 사이가 넓어졌다
기모노를 좋아하는 여자는
오사카를 떠나듯 곁을 떠났고
사막의 모래로 벽화를 그려 주고 얻은
가죽 외투로 바람을 막아 낸 후
비로소 시장기를 느꼈다
배고픈 하루가 손등에 핏줄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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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 1887년 작
*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43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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