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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5. 25.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만든다* - 이화인

 

 

제비가 집을 짓는데

천오백 번 이상 흙을 물어다 짓고

 

매미는 일주일을 살려고

어둡고 습한 곳에서 칠 년을 견뎌 낸다

 

아기가 삼천 번 이상

엉덩방아 찧고서야 일어설 수 있고

 

피겨 선수는 사천 번 나둥그러지고

제 몸을 꽃으로 피운다

 

소금 한줌 얻으려면

바닷물 아흔아홉 바가지를 햇볕에 다려 말리고

 

쌀 한 톨을 얻기 위하여

농부는 여든여덟 번 손길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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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에서 인용

 

 


 

슬픈 자화상 임영희

 

 

연식이 오래된 나는

건망증이라는 탈을 쓰고 살지

이끼 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지

느슨하게 풀린 나사가

낡고 녹슬어

수시로 간헐적으로

작동이 멈추거나 삐걱거리지

남은 찬은 아깝다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곰팡이꽃 활짝 핀 후에야

자책하며 버리게 되지

렌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도

낡은 깜박이는

머릿속 망가진 회로를 타고 와

정신 줄을 놓기 일쑤지

다른 세계에 푹 빠져 있다가

탄내가 풀풀

콧구멍으로 진입해아만

제정신이 번쩍 들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무료해서 소일거리를 만들지

오늘도 새카맣게 눌어붙은

냄비를 닦는다고

끙끙 안간힘을 쓰고 있지

 

 


 

정성수

 

 

마른나무에 귀를 갖다 대면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는지

 

모터 돌리는 소리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나뭇가지 끝 실핏줄 구석구석까지

보일러가

뜨거운 물을 보내면

 

봄은

온몸이 근질거린다며

참새 혀 같은 잎들을 밀어낸다

 

봄의 간절한 몸부림이 비로소 봄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고흐를 위하여 - 남대희

     -탕기영감*

 

 

사람을 그리고 나면

또 다시 사람이 그립다

 

귀를 잘라내고 난 후

눈은 귀 쪽으로 옮겨 와

눈 사이가 넓어졌다

 

기모노를 좋아하는 여자는

오사카를 떠나듯 곁을 떠났고

 

사막의 모래로 벽화를 그려 주고 얻은

가죽 외투로 바람을 막아 낸 후

비로소 시장기를 느꼈다

 

배고픈 하루가 손등에 핏줄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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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 1887년 작

 

 

* 월간 우리5월호(통권43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