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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6)

by 김창집1 2024. 5. 31.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서

길동무 되어서.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최경은

 

 

  이삿짐을 싸다가 텅 빈 사무실 벽을 바라본다 긁히고 패인 울퉁불퉁해진 벽, 갈라진 벽에 칠이 벗겨져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새겨 있었다

 

  벽을 경계로 집기들이 가려진 밀폐된 공간 속에 비밀스런 말이 숨어 있었다. 사나운 짐승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던 벽, 서로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웅웅거리던 말들이 벽을 타고 스멀스멀 구석으로 번진다 다독이며 위로하듯 위선적인 말들이 벽을 키우고 있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책상에 앉아 눈알만 굴리던 사람들, 서로 관심이 없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벽 몰래 은밀히 벽이 되어가는 얼굴들

  침침해진 눈,

 

  눈을 감고 벽을 만졌다

  내가 만져졌다

 

  무엇이 간지러운지

  자신을 가두었던 벽에서 튀어나온 나를 본다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펜치가 필요한 시점 - 김해인

 

 

짜장면과 짬봉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절단해 줘요

불가마에 단련된 최초의 연장이 되느냐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레디메이드 툴이 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후의 방향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한 끼 굶을 일을

어느 시궁창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이 친척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를 꾹 눌러서 이쪽저쪽으로 갈라줘요

이쪽으로 가면 강의 상류 끝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나고 싶죠

저쪽으로 가면 바다의 시작,

흰 치마를 펼쳐서라도 항해하는 게 로망인 걸요

밸런스게임은 사양할게요

이쪽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열려 있고

저쪽으로 가면 녹슨 대문이 부서져 있다거나

이쪽으로 가면 왕이 되고

저쪽으로 가면 거지가 된다는 동화 같은 거 믿으라고요?

차라리 사지선다형으로 바꿔주세요

검은 셔츠와 흰 셔츠 중 뭐가 필요하냐고요

지금은 펜치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청화백자운룡문호 - 유정남

 

 

발가락 넷 달린 용 한 마리를

달빛 침실로 모셔 온 것은

용띠 아들을 보기 위해서였을까

 

불을 끄고 누우면

천장 뚫고 구름 일으키며 용이 꿈틀거린다

 

발톱 다섯인 놈들은

머나먼 유리 궁궐 향해 떠나가고

 

이끼꽃 피는 조선의 어느 돌담길을 빠져나온 후

길 잃은 용 한 마리가

흙과 불의 사랑, 그 향기로운 뜨락 서성이고 있던

21세기의 나와 눈이 맞은 것이다

한반도에 휘몰아친 폭풍의 몇 세기를 건너오느라

여의주를 잃어버린 채 두리번거리던 푸른 짐승

 

그가 노니는 도자기의 우윳빛 가슴께가

번개에 데인 듯 어두워졌지만

페르시아에서 조선까지, 고지도 위를 물들이던

코발트 푸른빛이 살아 있어

나의 용은 몇 백 년을 살았어도 푸른 용이다

 

청화백자운룡문호 빠져나온 그와

꽃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밤

잉태한 여의주에 꿈을 아로새기는 달이 푸르다

 

 

        * 월간 우리5월호(통권 43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