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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7)

by 김창집1 2024. 6. 1.

 

 

건천乾川

 

 

냇바닥에 귀를 대면 물소리가 울려온다

 

바람 타는 섬 에서는 울음 뵈지 말라시던

 

어머니 흐느낌 같은

숨죽인 당부도 같은

 

화산 밑 마그마처럼 마르지 않는 눈물샘

 

들불 다시 번질세라 정낭을 걸어 봐도

 

장맛비 큰물이 질 때

함께 목을 놓는다

 

 


 

가시리*

 

 

그대 빈 들녘에도 사월의 산담이 있어

가시밭 한뎃길에 나를 두고 가시나이까

곶자왈, 곶자왈 같은

뙈기밭도 못 일군 채

 

조랑말 뒷발질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행기머체 찾아가는 갑마장길 오십 리에

따라비 따라비오름

바람만 우따라오네

 

막으려고 쌓으셨나, 가두려고 두르셨나

긴 잣성 허물어도 해제 못한 옛 소개령

억세게 머리 센 억새

기다림은 끝이 없네

 

하늘빛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살찐다는

테우리 눈빛 뜨거운 가시리 가을 앞에

사려도 사리지 못해

타래치는 내 사랑아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가을, 사려니

 

 

단풍나무 삼나무가

좌우로 버티고 섰다

유혈목이 허물 같은 오솔길 사이에 두고

 

빨강과 초록 잎들의

경계가 뚜렷하다

 

선 너머론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마주보며 갈라선 대치 정국

 

바람 탄 낡은 구호가

가지 끝에 나부낀다

 

대물림이 되는 걸까

색과 색이 부딪쳐서

먼 기억 끄집어내는 북받친밭* 가는 길섶

 

차라리

적록색맹의 눈을 갖고 싶었다

 

---

*1948년 말부터 19493월경까지 수백여 명의 피난민들이 숨어 지낸 제주시 조천면 교래리 소재 43유적지. 당시 무장대의 주력이었던 이덕구 부대가 머무르기도 해 이덕구 산전이라고도 한다.

 

 

 

 

 

    -경찰서장 문형순

 

 

까마귀만 몰래 찾는 이방인 묘역에서

삘기 꽃 수천 송이 헌화된 빗돌을 본다

 

감은빛 화산암 대신

화강암에 새긴 이름

 

피붙이 살붙이 없는 머나먼 심에 와서

오름 위로 번져 기는 들불 좋이 잠재우려

 

아니 불,

그 부적 하나 목숨처럼 품었던가

 

벌겋게 단 총구마다 바닷물을 끼얹으며

부당함으로 불이행 홀로 적던 꼿꼿 사내

 

그날의 문서는 남아

옛일을 증언하는데

 

모슬포 성산포를 돌아드는 뱃길 따라

씻김굿 판을 여는 저 난바다 숨비소리

 

핏빛놀 씻어낸 하늘

조등처럼 별이 뜬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