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천乾川
냇바닥에 귀를 대면 물소리가 울려온다
바람 타는 섬 에서는 울음 뵈지 말라시던
어머니 흐느낌 같은
숨죽인 당부도 같은
화산 밑 마그마처럼 마르지 않는 눈물샘
들불 다시 번질세라 정낭을 걸어 봐도
장맛비 큰물이 질 때
함께 목을 놓는다
♧ 가시리*
그대 빈 들녘에도 사월의 산담이 있어
가시밭 한뎃길에 나를 두고 가시나이까
곶자왈, 곶자왈 같은
뙈기밭도 못 일군 채
조랑말 뒷발질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행기머체 찾아가는 갑마장길 오십 리에
따라비 따라비오름
바람만 우~ 따라오네
막으려고 쌓으셨나, 가두려고 두르셨나
긴 잣성 허물어도 해제 못한 옛 소개령
억세게 머리 센 억새
기다림은 끝이 없네
하늘빛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살찐다는
테우리 눈빛 뜨거운 가시리 가을 앞에
사려도 사리지 못해
타래치는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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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 가을, 사려니
단풍나무 삼나무가
좌우로 버티고 섰다
유혈목이 허물 같은 오솔길 사이에 두고
빨강과 초록 잎들의
경계가 뚜렷하다
선 너머론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마주보며 갈라선 대치 정국
바람 탄 낡은 구호가
가지 끝에 나부낀다
대물림이 되는 걸까
색과 색이 부딪쳐서
먼 기억 끄집어내는 북받친밭* 가는 길섶
차라리
적록색맹의 눈을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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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말부터 1949년 3월경까지 수백여 명의 피난민들이 숨어 지낸 제주시 조천면 교래리 소재 4․3유적지. 당시 무장대의 주력이었던 이덕구 부대가 머무르기도 해 ‘이덕구 산전’이라고도 한다.
♧ 불不
-경찰서장 문형순
까마귀만 몰래 찾는 이방인 묘역에서
삘기 꽃 수천 송이 헌화된 빗돌을 본다
감은빛 화산암 대신
화강암에 새긴 이름
피붙이 살붙이 없는 머나먼 심에 와서
오름 위로 번져 기는 들불 좋이 잠재우려
아니 불不,
그 부적 하나 목숨처럼 품었던가
벌겋게 단 총구마다 바닷물을 끼얹으며
‘부당함으로 불이행’ 홀로 적던 꼿꼿 사내
그날의 문서는 남아
옛일을 증언하는데
모슬포 성산포를 돌아드는 뱃길 따라
씻김굿 판을 여는 저 난바다 숨비소리
핏빛놀 씻어낸 하늘
조등처럼 별이 뜬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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