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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8)

by 김창집1 2024. 6. 2.

 

 

조르바, 너는 지금 뭐하니

    -‘그리스인 조르바영화를 보고

 

 

내가 오늘 처음 세상을 대하는 것처럼

감탄할 수 있다면

골목길을 걷다가 돌멩이를 만나도

새소리를 듣거나 풀꽃을 보면서도 처음 보는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감탄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내 머릿속은 수십 가지 생각으로

거미줄을 치며 그네를 탄다

일을 하면서도 빌딩을 지었다 허물었다

모래성을 쌓는다

지금이 순간

눈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내게도 놀람과 감탄으로 환희를 느끼며

꽃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귀가 있다면

소유에 대한 무거운 집착을 훌훌 벗어던지고

나의 감옥에서 용감하게 탈출하여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우리 함께 춤을 출 수 있겠지

조르바, 너는 지금 뭐하니?

(키스해)

(그럼 딴생각하지 말고 키스하는 데만 집중해)

산토르 악기 소리가 강물같이 밀려온다

사업의 실패 앞에서도

갈탄광을 다 말아먹고도

하늘보고 땅을 보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새처럼 날아오른다

 

 


 

해무

   - 극단가람 해무연극을 보고

 

 

공미리 잡이를 나선 전진호 선원들

만선의 꿈을 꾸지만

공수표를 날린다

거듭되는 조업의 실패로

선장은

조선족 밀항에 손을 댄다

 

딱한 번의 기회로

전진호도 살고

선원들도 목돈 한번 쥐어보자고

양심 같은 건 바다로 던져버렸다

 

조선족 사연도 가지가지

밀항한 남편을 만나러

오빠를 찾아서

어 린 자녀를 떼어놓고 돈을 벌겠다고

저마다의 꿈을 갖고

어창에 몸을 숨겼다

심한 풍랑과

해경의 눈을 피해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해무와 싸우며 전진을 해보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그들의 꿈을

지우개로 지우며 지나갔다

잘살아 보자고

목돈 한번 잡아보겠다던 허황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좁은 어창에서 잠을 자듯

꿈을 베고 집단 질식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인생

 

 


 

욕망

   -‘노트르담 드 파리뮤지컬을 보고

 

 

마법에 걸린 듯

사람들은 사랑에 눈이 멀었네

집시여인의 무희 속으로

너도나도 빨려들어 가네

 

세상에서 가장 추한 종지기 꼽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시 여인을

사랑해 버렸네

근위대장도 약혼녀를 배신하고 사랑에 빠졌네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직자도

집시 여인의 사랑을 구걸하네

 

황홀한 착각을 사랑의 진실이라 믿고 싶었지

당신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눈먼 집착으로

내가 무너지고

우리가 무너지네

 

노랑나비 춤사위 따라

모두모두 날아가네

낭떠러지를 향해

저 깊은 수렁 속으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