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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제69회 '현충일'에 부침

by 김창집1 2024. 6. 6.

 

 

감자꽃이 피었다 - 김종제

 

 

가칠봉 기슭의 펀치볼에

선혈 같은 감자꽃이 피었다

 

순교자의 흰 피를 보았으니

며칠 있다 저 꽃 지면

기적으로 생겨난

굵은 살점 같은 감자를 캘 수 있겠다

 

격전의 여름이 가기 전에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이라

목이 메이도록

눈물의 감자밥을 먹을 수 있겠다

 

유월의 전쟁에서

뼈도 찾지 못한 목숨들이 많아

감자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땅 밑에 부둥켜안고

함께 드러누워버린 생()이여

팔을 뻗어 가까스로 손닿고

이름 부르고 간 명()이여

이 산하 곳곳이 폭탄 맞아

움푹 패인 감자를 닮았다

 

저 감자꽃이

순국의 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성전의 경구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주검 대신 얻은 저 핵의 알갱이

희생으로 일궈낸 저 골수

모난데 없이 둥글다

 

삶을 다 토해낸 인생이

감자꽃으로 피었다

 

흰 옷 수의로 갈아입고

관 열어젖힌 세상을 보았다.

 

 


 

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 - 정희성

 

 

서둘러 그대를 칭송하지 않으리

이승의 잣대로 그대를 잴 수야 없지

그대는 나에게 한이고 아쉬움

이 아쉬움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지만

그대는 처음 죽는 사람도 아니고

이 더러운 현대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살해당한 사람

나는 전쟁통에도 불타지 않은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不二門)에 이르러

그대의 마지막 부음을 듣는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

하나도 못 된다면 반쪽이지

통일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걸어온 길이 뒤집히는 꼴을 보면서

그대는 기어이 등을 보이는구나

아아 노여움을 품고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 거지!

누가 와서 내 가슴 쓸어주었으면!

사명대사 동상과 만해 시비 앞에 서서

나라 사랑 못 느낄 자 누구랴마는

나는 별수 없는 떠돌이 시인

그대가 끝까지 귀를 열고 기다렸을

좋은 소식 전해주지 못한 채

고성 외진 바닷가에 이르러

마시던 술을 바다에 쏟아버린다

그대여 이 경박 천박한 세상 말고

개벽세상에나 가 거듭 나시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 - 문병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철조망이나 탱크가 아니다.

 

철조망이나 탱크보다 더 완강한 것은

우리들의 편견, 우리들의 이기심,

형제의 손에 떡 대신 돌을 쥐어 주는

욕망의 빌딩을 쌓아올리는

모진 놀부의 욕심에 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제국주의나 파시즘의 논리만이 아니다.

 

최루탄보다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기득권, 우리들의 독점욕,

형제의 가난까지 훔쳐다 투기하고

손만 닿으면 황금이 되는 마이더스의 욕망,

수천억의 공장을 통째로 삼키는 저금통장에 있다.

 

우리를 가로막고 갈라놓는 것은

휴전선이나 판문점 초소가 아니다.

 

잘못된 지배논리, 약한자의 이마를 딛고

핏줄기보다 인간끼리의 참된 사랑보다

얼굴이 닮은 동포의 의리보다

더욱더 소중한 부동산 문서,

보다 더 튼튼한 권좌를 위하여

남 몰래 들여다보는 비밀구좌를 위하여

형제의 가슴에다 칼을 박는 지배욕,

가는 곳마다 말뚝을 박는 독점자본에 있다.

 

가슴마다 철조망을 쳐놓고

가슴마다 38선을 금그어 놓고

이웃을 거부하고

동족을 거부하고

형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형제의 이마에 모진 돌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믿는 제도라는 맹목의 살인도구,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합법적 살인종교,

전쟁이라는 괴물을 믿고 있는 정치에 있다.

 

사람이 사람을 가로막는 담을 헐어내기 전에는

형제의 눈에 티는 보며 내 눈의 들보는 못 보는

고질병 이기주의의 눈꼽을 닦아내기 전에는

가슴과 가슴에 가로놓인 불신의 장벽

보다 더 완강한 38선을 걷어내기 전에는

형제의 피와 살을 팔아 즐기는 부귀영화

흡혈의 독점, 정치의 우상을 벗겨내기 전에는

 

끝끝내 물러가지 않을 외세 귀신이여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견우와 직녀의 이별이여 이별이여.

 

나는 너의 절벽이 되고

너는 나의 절벽이 되고

 

또 하나의 38선 앞에서

또 하나의 6·25

또 하나의 5·18

또 하나의 기나긴 남북대결 앞에서

진정 우리들의 적은 우리들 자신

형제의 가슴에 축하의 꽃다발 대신

모진 증오의 총칼을 들이대고

형제의 이마에 돌을 던지는 편견

사랑을 거부하는 독선과 오만의 이기심에 있다.

 

진정 그대는 손에 쥔 돌멩이로

누구의 이마를 치려 하는가

진정 그대는 손에 쥔 총칼로

누구의 가슴을 겨냥하려 하는가.

 

오호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호 우리를 서로 적이 되게 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