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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8)

by 김창집1 2024. 6. 8.

 

 

산천단 곰솔

 

 

붉은 깃발 푸른 깃발

다 내린 오름 기슭

 

등 돌린 마을 향해 축문 외는 솔이 있다

바람결 혀짤배기소리 신음처럼 내뱉으며

 

누구를 위령하려고

하산 꿈을 접었을까

 

향기 없는 꽃만 피는 사월의 제단 앞에

지난 일 고해를 하듯 허리 살짝 굽힌 채

 

산지천 물길로도

끄지 못한 그날의 불길

 

타고 덴 자리마다 현무암 및 옹이가 돋아

그늘진 한라의 뒤꼍 보굿만 키웠던가

 

바늘잎 나란히 세워

비손하는 섬의 봄날

 

선 굵은 주름살을 나이테로 박제한 채

산천단 늙은 제관祭官들 제향을 또 준비한다

 

 


 

다랑쉬 노을

 

 

봉분 같은 오름 사이

불기운이 번져간다

 

우두커니 홀로 남은 마을 표석 배경으로

못다 끈 가슴속 불길 저렇게라도 토하는지

 

타버린 집과 밭에 타지 못한 기억들이

뿌리 깊은 억새처럼 봄만 되면 되살아나

화산도 분화의 습성 끈덕지게 잇나 보다

 

화재신고 빗발쳐도

오지 않는 불자동차

 

깃 바랜 상복 입은 까마귀만 떼로 와서

무너진 밭담에 올라 이슥토록 곡을 한다

 

 


 

산물

 

 

  제주도 바닷가엔 어디에나 산물이 있다

  산에서 내려와서 살아있는 생명수라며

  예부터 물 나는 곳에 마을이 들어섰다

 

  밥 짓고 빨래하며 가축 목도 축이는 샘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오래 가는 도두동 오래물과 말물, 자갈 모래 깔린 바다 모살원에서 솟는 이호테우 해변의 문수물, 삼별초 피땀 같은 항파두성 장수물, 죽어가는 사람까지 한 모금에 살린다는 김녕리 개웃샘물이 바닷가에서 다시 솟는 푸른 빛 청굴물, 범섬을 바라보는 법환동 두머니물, 조천리 개당개바당의 수룩물 엉물 도릿물 절간물 두말치물, 현무암 절리 사이 맑게 솟는 금릉리 사은이알물, 일과리 장수원에 마지막 남은 웃동 당물, 큰코지와 새똥코지 사이 갯가 조바원에서 용솟음치는 신촌리 조반물 옆 엉창물과 감언물, 마을 사내 어녹이던 하도리 필개물과 들령물, 큰 바위 밑으로 시원하게 흐르는 심양해변 영덕물과 그 아래 셋다리물, 해녀상이 지키고 선 곽지과물과 뼛속까지 얼어붙는 예래동 논짓물, 상귀리 구시물과 장수물, 고성리 옹성물, 귀덕리 굼둘레기물, 한수리 동그란물과 솔펙이물, 잊히고 메워진 곤을동 안드렁물

이름은 모두 달라도 차갑기는 얼음 같다

 

  산물 솟는 마을에는 울음도 솟아난다

  지난날 다 못 퍼낸 눈물은 아직 남아

  고사리 물오를 때면 온 섬이 물바다다

 

  물허벅에 물이 비면 집안이 망한다던

  할망 어명 삼촌들은 빗돌로만 서 있는데

  그 말씀 빌레를 뚫고 용천수로 솟는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