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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9)

by 김창집1 2024. 6. 7.

 

 

 

나의 책속에는 책갈피가 없다

 

 

  이홉짜리 소주병이 거친 눈발과 부딪치며 시멘트 바닥 위를 뒹굴고 있다

 

  어머니는 돌담 뒤에 숨어 토끼눈처럼 끔벅거리며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 그해 겨울날 엄마의 유일한 친구는 갈색 길고양이었다 갈색 길고양이를 품은 엄마는 온몸이 따뜻했다 문밖에는 슬픔과 따뜻한 계절에 대해 쓰여진 찢어진 책들이 날렸다 책    겉표지엔 감추고 싶은 우리들의 오랜 상처처럼 쥐 오줌이 얼룩져 있다

  누군가 성급히 벗어 놓은 고무 슬리퍼가 배추 잎사귀처럼 마당에 버려져 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뒹굴던 소주병에 부딪쳐 주저앉는다

  창틀에 끼여 반짝였다

  단단한 구슬처럼 동생의 벌린 입속으로 굴러 간다 따뜻하게 녹여먹었다

 

  아버지는 달빛이 비치면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달빛은 다행히도 동생의 그림자 위에서 정신을 잃는다

  아버지가 정말 늑대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어둠속에서 내리던 눈들이 시멘트 바닥에 부딪쳐 쓸쓸히 울부짖는다 아버지의 누런 러닝셔츠와 줄무늬 체육복이 문틈 사이로 백열등처럼 깜박거린다 아버지의 몸에 달라붙은 알콜 냄새가 천정에 매달렸다가 마룻바닥 위로 핏방울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가녀린 내 어깨를 짓누른다 추운 공기로 채워진 나의 혓바닥은

  얼어붙어 소 리 지 를 수 없 다

 

  아무 말 없이 울고 있는 누나가 알콜 냄새가 고인 마룻바닥을 걸레질한다 마룻바닥이 누나를 걸레질한다 멜론향이 풍기는 누나의 긴 머리카락이 백열전등 밑에서 흔들린다 머리카락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충혈된 눈동자가 앙골라 토끼눈처럼 대리석으로 된 천정을 바라보며 끔벅거리다 닫혔다

 

  소주병이 부들부들 떨면서 눈 속에서 잠들었다

 

  그해 겨울날 눈과 눈들 속에서 잠깐씩 비치는 별들과 바람에게서 버터냄새가 났다 알콜에 취한 별들이 뒷마당 싱싱한 배춧잎 위에 떨어져 애벌레처럼 깜박거린다

  모든 게 우울한 악몽이었다 유령 같은 나날이었다

  그래서 나의 찢어진 영혼에는 책갈피가 없다

 

 


 

아침에는 캔 커피를,

 

 

난 매일 아침 레쓰비* 캔 커피를 마신다 하루에 다섯 캔씩 먹어야 살 수 있다

다섯은 당신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으면 흔들리는 다섯 개의 꿈

 

늙고 마른 엄마들이 커피콩을 가지고 커피공장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허물어진 벽을 둥그렇게 치대어 핫케익과 휘핑크림을 만들었다

일요일에는 커피와 핫케익을 가지고 지구를 한 바퀴 산책해요

캔커피와 핫케익은 눈 없는 소녀의 빨간 블라우스일까요

 

커피콩나무 구멍 속으로 시인은 시를 쓰러 들어가고

커피콩나무 구멍 속에서 소녀의 눈물이 커피콩이 되기도 하고

혹은 커피콩나무를 잽싸게 으르는 도마뱀이 되기도 하고

 

앙상한 나무들이 부스스 낙엽을 떨어뜨리며 수군거리고

앞집 할아버지가 먼지를 쓸어내다 기울어진 먼지에 눌려 죽었대

100일 된 옆집 아기가 마루에 버려진 핫케익 속에 빠져 죽었대

부모들은 아동학대죄로 처벌을 받는다네

사악한 먼지들은 가지를 흔들며 웃었대

아침마다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오늘 죽을 자의 이름을

서글피 불러대는 것 같다

레쓰비를 먹은 사람들은 엔돌핀이 넘쳐흘러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웃었대

상갓집에 벗어 놓은 신발 속에 몰래 들어가 찍찍찍 암호를 주고받으며 웃었대

커피공장 하수구로 고래들이 죽어 나오고

커피의 성분 때문에 썩은 이빨들이 바람의 피부에 박혀

윙윙 죽은 소리를 내고 내 입속은 온통 임플란트 무덤이 돼야 했다

 

레쓰비 캔 커피를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심장이 떨리고 심장이 잠이 들고

마을 작은 슈퍼에서 캔 커피를 파는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상큼한 사과같다

그러나 캔 커피의 레시피는 빙하기 얼음 산맥에 숨겨져 있어

아무도 모른다죠

가끔 이곳을 지나가는 회색 갈퀴를 가진 거대한 늑대들만이 알 수 있다죠

늑대들은 계곡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곡에는 커피콩이 강처럼 흐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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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쓰비 : 레쓰비(Let’s Be)는 갠 커피 이름. 우리 함께 라는 뜻의 Let’s Be Together에서 Together를 줄인 말로서 커피를 마실 때에는 항상 레쓰비를 마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무들이 자라나는 배꼽

 

 

당신의 슬픈 배꼽에는 나무들이 자랍니까 꽃들은 피어나나요

배꼽이 거대한 숲이 되어 캄캄해질 때 어둠의 악령을 몰아내는

불타는 태양이 떠오르죠 꽃나무에서 떨어지는 가여운 꽃잎들은

모두 배꼽 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차가운 바람들이 배꼽 속을 지나 입속에서 뿜어져 나올 때

따뜻한 심장하나 가진 바람이 됩니다

삶에 지친 영혼들은 자신의 배꼽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잡니다

그곳은 아주 고요하고 따뜻하답니다

배꼽 속으로 기다란 손가락을 꾹 찔러 봅니다 그 냄새가 길가에 떨어진

은행나무 열매처럼 아주 향기로울까요

배꼽 속에서 검은 구름들이 나와 하늘 속에 위태롭게 걸립니다

비들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 세상의 모든 강물들은 신들의 배꼽 속으로

흘러들어 간답니다 그래서 신들의 배꼽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죠

나는 배꼽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아빠의 배꼽, 엄마의 배꼽, 누나의 배꼽, 동생의 배꼽 이들은 너무 즐거워 웃고 있네요

그리고 우울하고 슬픈 나의 배꼽은 항상 아파요

죽고 싶을 만큼 아플 때도 있어요 그때는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를 하죠

이 아픔이 당신의 눈동자 속에 고인 눈물이 될 순 없나요

나는 작은 연못 같은 배꼽 속에 잉어 한 마리 기우죠

나는 불행히도 친구가 없답니다

나는 책가방을 연못 옆에 놔두고 고개를 숙여 몸속의 잉어를 바라보죠

잉어들은 다행히도 건강하고 잘 자라고 있어요

잉어들이 다 자라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강으로 보낼 생각이에요

나의 가여운 영혼도 잉어를 따라 깊은 강 속으로 흘러들어 갈지도 모르죠

 

태양의 신이여 나의 작고 여린 배꼽 속으로 햇살 한줌 떨어뜨려주세요

햿살들이 자라나서 거대한 태양이 잉태되면 태양을 꺼내

차가운 눈물들이 흘러가고 있는 어두운 골목 한 귀퉁이에 매달게요

저녁이 되면 자신의 몸속에서 떨어져 나온

예쁘고 작은 배꼽들이 우르르 어두운 골목을 눈발처럼 몰려다니고 있네요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세계, 2023)에서